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거대강입자가속기(LHC)는 현존하는 가장 큰 입자가속기다. 스위스와 프랑스 국경지대 지하 175m 깊이에 있는 LHC의 지름은 8m, 둘레 27km에 이른다. 이 거대 실험실은 2012년 ‘표준모형’에서 예측한 마지막 기본입자인 ‘신의 입자’, 힉스 보손(Higgs boson)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 발견은 피터 힉스 박사가 2013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힉스 이후의 고에너지 입자물리학 연구는 힉스의 성질을 엄밀하게 규명하고, 새로운 고에너지 물리현상을 발견하는 방향으로 진행 중이다. 이에 따라 더 높은 규모의 고에너지 입자 물리를 주도할 강력한 에너지를 가진 입자가속기 개발도 활발하다. 문제는 가속기 크기와 건설비용인데, 이 문제를 해결한 ‘신개념 고에너지 가속기’가 네이처(Nature)에 소개돼 화제다.
- [Nature] CERN’s pioneering mini-accelerator passes first test
- [동아일보] ‘플라스마 파도’ 만들어 입자 가속… 소형 가속기 실험 성공
이번 연구에 비유럽권 연구팀은 UNIST 물리학과의 정모세 교수와 그의 제자, 김성열 연구원이 유일하다. 이들은 국제공동연구그룹인 어웨이크(AWAKE)에 참여해 전자빔 입사 최적화와 빔라인 설계 부분의 연구를 수행했다. 참고로 어웨이크 연구그룹은 CERN, 막스플랑크연구소 등 유럽 연구기관을 중심으로 꾸려졌으며, 2013년부터 본격적인 실험 준비를 시작했다.
정모세 교수는 “이번 연구의 성공으로 LHC 뒤를 이을 차세대 가속기 개발의 페러다임이 바뀔 수 있을 것”이라며 “수십 km에 이르는 가속기 크기를 1km 이내로 줄일 수 있어 건설비용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이번에 발견한 방법은 X-선 자유전자레이저(X-ray Free Electron Laser, XFEL)에 필요한 고에너지 고휘도 전자가속기를 소형화하는 데도 활용될 수 있다”고 기대했다.
기존 가속기에 쓰이던 금속 가속관은 기술적 한계가 있어 단위 길이 당 에너지 이득이 0.1기가전자볼트(GeV) 정도로 제한된다. 따라서 힉스 이후의 연구를 위해서는 더 큰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거대 경입자 충돌형 가속기(Lepton collider)’가 필요하다. 현재 건설을 논의 중인 이 가속기는 수십 km에 이르는 크기에 건설비용도 수 조원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비용을 줄이는 대안으로 ‘플라즈마를 이용한 가속기 개발’이 제안됐다. 플라즈마 내에 웨이크필드(Wakefeild)라는 일종의 플라즈마 파동을 발생시키고, 이때 만들어지는 강력한 전기장을 이용해 전자를 가속하는 개념이다. 이때 단위 길이 당 에너지 이득은 금속 가속관보다 100~1000배가량 커진다. 하지만 플라즈마 웨이크필드를 만들 때 사용하는 레이저나 전자 빔의 에너지가 낮아서 한 번에 가속시킬 수 있는 전자 에너지는 제한적이었다.
어웨이크팀은 레이저나 전자빔 펄스가 아니라 LHC를 이용해 플라즈마 웨이크필드를 발생시켰다. LHC에서 쓰이는 강력한 양성자 빔은 수백에서 수천 GeV의 에너지를 가지므로, 입사된 전자나 양전자를 수백 GeV 영역으로 가속시키기 충분하다. 문제는 양성자 빔의 길이가 지나치게 길어서 플라즈마 웨이크필드를 발생시키는 데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점이었는데, 어웨이크팀은 이 문제를 ‘자가 빔 변조 불안정성(Self-Modulation Instability, SMI)’ 현상을 이용해 극복했다.
정 교수는 “CERN의 슈퍼 양성자 싱크로트론(Super Proton Synchrotron, SPS)에서 인출된 400GeV 양성자 빔을 사용하고, 길이 10m의 루비튬 플라즈마 셀 내부에서 강력한 플라즈마 웨이크필드가 발생되는 걸 실험적으로 관찰했다”며 “플라즈마 웨이크필드에 의해 만들어진 전기장에 전자를 입사시켜 10m 진행 후 약 2GeV로 가속되는 걸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LHC에서 플라즈마 웨이크필드를 발생시키는 게 실제로 가능할지에 대해 연구진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중이었다”며 “5년 동안 애쓴 실험이 성공한 것도 기쁘고,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한국과 UNIST의 물리학 연구역량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도 뿌듯하다”고 전했다.
이번 연구는 한국연구재단 이공학 개인기초연구지원 사업과 글로벌박사양성사업의 지원으로 이뤄졌다.
※ 용어 설명
- 플라즈마 웨이크필드 (Plasma Wakefield): 플라즈마에 매우 강력한 레이저 펄스나 전자 빔 펄스를 입사시키면, 펄스 주변으로부터 플라즈마 전자가 밀려나게 되어 밀도 변조가 일어나게 된다. 이때, 밀도 변조된 플라즈마 전자와 거의 움직이지 않는 플라즈마 양이온 사이에는 강력한 전기장이 형성되고 플라즈마 고유 진동수에 따라 파동이 발생되는 데 이를 플라즈마 웨이크필드라고 부른다. 플라즈마 웨이크필드를 효과적으로 발생시키기 위해서는 펄스의 길이가 플라즈마 파동의 파장보다 짧아야함이 알려져 있다. 이러한 웨이크필드를 이용하여 입자를 가속하는 개념은 1979년 미국 UCLA의 과학자들에 의해 처음 제안됐다.
- 자가 빔 변조 불안정성 (Self-Modulation Instability, SMI):양성자 빔의 경우 그 길이가 대체로 플라즈마 파장의 수십 배를 초과한다. 이러한 사실은 위에서 설명한 플라즈마 파동 발생을 위한 조건에 위배되며 따라서 양성자 빔에 의한 플라즈마 웨이크필드 발생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해결 방안으로서 AWAKE 연구진은 자가 빔 변조 불안정성 (Self-Modulation Instability, SMI) 현상에 주목하였다. 일반적으로 플라즈마 불안정성은 발생을 억제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기 쉬우나, 구동 빔과 플라즈마 상호작용의 결과로 발생하는 해당 불안정성을 적절히 제어하면 매우 긴 길이의 양성자 빔을 플라즈마 파장 크기로 나누어진 수많은 작은 빔(Micro bunch)으로 만들 수 있다.
- 전자 입사 (Electron Injection): 플라즈마 웨이크필드에 의해 형성된 전기장에 플라즈마 파장보다 짧은 길이의 전자 빔 뭉치를 시간적 및 공간적으로 최적화된 형태로 집어넣는 것을 일컫는다. 외부에서 별도의 전자 빔 뭉치를 준비해서 입사하는 방법과, 플라즈마 전자의 일부를 자가 입사(Self-Injection)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파도에 서핑보드를 태우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