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벽면을 가득 메운 것은 티백이다. 물에 담그면 자연스레 우러나 향과 색을 더하는 티백과 같은 모양이지만 내용물은 조금 다르다. 젤라틴과 퐁퐁(세제), 색소를 섞어 만든 형형색색의 작품들이 그 안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이름도 ‘퐁차’다. 차가 우러나며 물을 변화시키는 것처럼 인간의 삶 속에서 만들어진 것들은 물을 오염시키고 변화시킨다. 수많은 모양으로 표현된 퐁차는 물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퐁차 쇼룸(PONG-CHA SHOWROOM)’, 허희진作>
#2. 우리가 먹고 마신 후 버린 것들은 물과 땅으로 돌아가고, 이들은 다시 우리에게 돌아온다. 우리 생활 속에 발생한 오염은 다시 우리 몸을 오염시킨다. 이 관계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돼있다. 똥본위화폐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삶의 양식도 마찬가지다. 멈추지 않는 순환 속에서 가치를 되살리면 그 가치 또한 끝없는 관계를 거쳐 우리 삶으로 돌아올 수 있다. 환경데이터를 시각화 한 뫼비우스의 띠에서 바이오가스를 힘의 원천으로 솟아오르는 똥본위화폐 ‘꿀’은 새로운 순환이 끝없는 가치를 만들 수 있다고 외친다. <‘Hypo-connected society’, 구지은&최미진作>
12월, UNIST 과일집(125동, Science Cabin)에 과학과 예술이 함께하는 전시가 열린다. 10일(월) 문을 연 전시는 28일(금)까지 이어진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요일을 제외한 모든 날에 누구나 찾을 수 있다.
‘Infinity fSM(Feces Standard Money, 똥본위화폐)’를 주제로 기획된 이번 전시에는 총 9점의 작품이 전시됐다. 전시공간으로 탈바꿈한 과일집엔 설치작업은 물론 사운드와 비디오아트까지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독특한 작품들이 선보였다. 이들 작품은 똥본위화폐와 자원순환, 수질오염과 물 환경, 융합과 협업 등 세 가지 주제를 각자의 방식으로 표현했다.
구지은 작가가 전체 전시책임자를 맡았으며, 전문 작가들 외에 사이언스월든 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있는 연구원들이 작품 활동에 참가해 눈길을 끈다. 9월부터 기획한 이번 전시는 아이디어 구상, 재료 선정, 작품 제작 과정을 포함해 3개월 이상의 준비과정을 거쳤다. 연구원들은 일과가 끝난 후 저녁시간이나 주말 등 개인시간을 활용해 작품 활동에 열중했다.
11일(화) 열린 오프닝 행사에서는 전시를 준비한 구지은 작가, 이현경 기초과정부 교수, 최미진 연구교수, 김대희, 최미출, 윤빛나 연구원과 허희진 학생이 참가해 작품에 대한 소개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구지은 작가는 “‘Infinity fSM’이라는 전시 주제처럼 똥본위화폐에는 끝을 알 수 없는 무한한 매력이 있다”며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은 똥본위화폐를 계속해서 바라보고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전시 기획의도를 밝혔다.
이어 조재원 사이언스월든 센터장(도시환경공학부 교수)가 “사이언스월든에 대한 이해의 순간들이 모여 언젠가 스파크를 일으키고 변화를 만들 것”이라며 “놀라운 공간을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 해주신데 감사드린다”고 인사를 전했다.
똥본위화폐는 UNIST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이언스월든 프로젝트가 추구하는 중요한 주제다. 똥본위화폐는 비수세식 화장실인 비비변기로부터 시작된다. 물의 사용량을 최소화하면서 변을 재처리하는 과정을 거치면, 이는 바이오가스로 변환돼 새로운 에너지가 된다. 이 에너지는 난방, 온수 등을 위한 연료로 활용될 수 있고, 그만큼의 가치는 변을 생산한 사람에게 돌아간다.
과일집은 사이언스월든의 똥본위화폐 실험을 위해 마련된 생활형 연구실로, 평소 바이오가스 생산 및 활용에 관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그리고 이번 전시와 마찬가지로, 과학-예술 융합 프로젝트가 진행되며 전시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올해 11월에는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젝트를 통해 전원길, 임승균 작가가 머무르며 작품활동을 진행했으며, 다가올 1월에도 3명의 작가들이 입주해 사이언스월든의 정신을 표현하기 위한 레지던시 프로젝트에 돌입할 예정이다.
UNIST Newscenter에서는 12월 전시에 전시된 작품들을 조금 더 가까이 살펴봤다.
<‘25세기 그랜드폴리’, 구지은 & 윤빛나作>
전시를 보기위해 과일집을 찾으면, 입구에서 협곡을 만나게 된다. 형형색색의 기암괴석은 합성섬유가 쌓여 형성된 미래다. 합성섬유를 쌓아 만든 발판에 올라보면 이 협곡을 더욱 가까이 바라볼 수 있다.
윤빛나 연구원은 “평소 옷을 자주 사입는 편인데, 작품을 구상하면서 이렇게 내가 산 옷들이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묻게 됐다”며 “합성섬유를 만들고, 이를 세탁하고, 버리는 인위적 과정이 쌓이면 저 먼 미래에는 이 인위가 모여 자연스러움으로 변모하지 않을까 하는 발칙한 상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멤브레인타워’, ‘흐르는 꿀’, 구지은作>
구지은 작가는 2년 전부터 사이언스 월든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그녀는 올해 5월에 진행된 ‘Flowing Point’ 전시에서도 기획자로 참여해 과학예술 융합프로젝트를 추진한 바 있다. 당시 구 작가는 ‘Flowing Islands’라는 작품을 통해 협업과 융합의 의미에 대한 고민을 던졌다. 당시 작품에서는 수많은 튜브가 서로 연결하고 관통하는 모습을 선보였다. 구 작가는 이를 통해 “융합과 소통은 서로 뭉치고 부딪쳐야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번 전시에서의 멤브레인 타워는 당시의 생각에서 한발 나아갔다. 미세조류가 흐르던 관들은 이제 타워 속에서 각자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 이 개체들은 스스로 하나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다수로서 하나의 전체를 구성한다. 스스로 호흡할 수 있는 안정과 여유를 가질 때 개체들이 모인 전체 또한 안정된 호흡을 할 수 있을 것이란, 융합과 협업에 대한 또 다른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멤브레인 타워 옆 한편에는 ‘흐르는 꿀’이라는 제목의 영상작업이 함께하고 있다. 물 위를 떠다니는 ‘꿀’은 물의 순환과 흐름 속에서 생성되는 가치와, 이를 통해 성장해나갈 똥본위화폐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법의 성’, 이현경 & 구지은作>
육각형은 효율적이고 완전한 구조로 알려져 있다. 사이언스월든의 화폐인 ‘꿀’은 육각형 벌집에서 나온다. 사이언스 월든의 1기 프로젝트였던 사월당(사이언스 파빌리온)의 형태도 육각형이었고, 현재 사이언스월든 프로젝트를 상징하는 로고도 육각형 모양이다.
사이언스월든이 추구하는 수많은 가치들은 육각형 안에서 융합하고, 충돌하고, 움직이고, 부딪치고 있다. 관객들이 직접 내부 소품을 움직이고, 만질 수 있는 이 작품 속에서는 끊임없는 변화와 융합이 일어난다. 참여자 모두가 가치를 만들 수 있고, 변화할 수 있는 곳. 그 마법의 성이 바로 사이언스월든이다.
<‘계획된 정원’, 박승진作>과 <‘PVC Aurora Wave’ 구지은 & 최미출作>
과일집 2층에서는 박승진 작가가 제작한 3D 영상작업을 확인할 수 있다. 작가는 영상을 통해 현대사회를 표현했다. 다소 기괴하고 부자연스럽게 보이기도 하는 이 영상은 무감각과 타성, 전쟁과 기근 등 현대사회의 부정적 단면을 드러낸다.
최미출 연구원과 구지은 작가가 만든 작품은 그 바로 아래 위치해있다. 현대사회의 단면과, 사이언스월든이 꿈꾸는 미래가 이 물결을 사이에 두고 만나는 것이다. 도시의 산물인 PVC를 촘촘하게 직조한 이 물결은 견고하고 변화하지 않는 현대인의 인식이자 바다 위를 떠다니는 기름때다. 하지만 동시에 이는 유동적인 물결이며 깨지기 쉬운 신기루기도 하다. 물결 아래의 새로운 가능성은 신기루를 넘어야만 보인다.
<‘Flushing away is not the end’, 김대희作>
김대희 연구원은 우리 주변의 소리를 담았다. 그의 질문은 ‘오염’의 의미에서 시작된다. 사람은 활동을 통해 즐거움을 얻고 삶의 의미를 찾는데, 오염은 이러한 사람의 활동에서 발생한다. 활동은 아름답고 좋은 것이고, 오염은 아름답지 않은 것일까? 오염은 살아있음의 증거인데 이를 부정해야만 할까? 그는 주변의 소리를 모아서 변형했다. 기계문명과 자연, 사람들의 활동과 그로 인한 오염에 대한 소리를 들으며 그 모든 것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