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최초로 시스템 소프트웨어 분야 최고 학술대회의 의장을 맡게 돼 영광입니다. 최근 크게 발전한 국내 저장기술 분야가 더욱 힘을 받는 기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전기전자컴퓨터공학부의 노삼혁 교수가 유즈닉스(USENIX)에서 주관하는 ‘제18회 유즈닉스 파일&저장기술 콘퍼런스(18th USENIX Conference on File and Storage Technologies, 이하 FAST ’20)’의 프로그램 의장으로 선출됐다. 플래시 메모리(Flash Memory)를 비롯한 국내 저장기술이 학술적으로도 세계 수준에 이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신호로 풀이된다.
유즈닉스는 1975년 설립된 고급 컴퓨팅 시스템 협회(Advanced Computing Systems Association)다. 컴퓨터 시스템 개발자와 관리자는 물론 컴퓨터 분야 연구자와 엔지니어 등이 모여 관련 분야 연구개발 결과를 공유하고 발전시켜왔다. 이 협회는 특히 컴퓨터 시스템 분야에서 최고 권위를 자랑한다. 유즈닉스가 주관하는 주제별 학술대회에서는 전 세계를 이끌어가는 탁월한 연구들이 발표된다. 그만큼 학회의 총괄 의장의 역할이 중요한데, 지금껏 한국인이 의장을 맡은 사례는 없었다.
노삼혁 교수는 “윈도우즈(Windows)나 리눅스(Linux) 같은 시스템 소프트웨어는 눈에 잘 띄지 않지만, ‘공기’처럼 컴퓨터 세계에서 당연시되는 필수 기술”이라며 “오랜 경험을 쌓으면서 지식을 터득하는 분야인 만큼 앞서 시작한 나라들이 기술을 주도해왔다”고 전했다.
그런데 시스템 소프트웨어 중 저장기술 분야에서는 최근 한국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삼성전자 등의 기업이 플래시 메모리(Flash memory)를 기반으로 한 SSD(Solid-State Drive) 기술을 선점하며 세계를 선도하는 수준까지 왔기 때문이다. 일찌감치 플래시 메모리를 비롯한 비휘발성 메모리 저장기술을 연구해온 노삼혁 교수도 조명받기 시작했다. 2016년 8월부터 미국 컴퓨터학회(Association for Computing Machinery, ACM)에서 발행하는 ‘트랜잭션 온 스토리지(Transactions on Storage)’의 편집장으로 뽑혔고, 2017년에는 ACM 특훈회원(Distinguished Member)으로도 선정됐다.
특히 노 교수는 저장기술 분야에서 최고 학회로 꼽히는 FAST에서 지난 몇 년간 꾸준히 논문을 발표해왔으며, 2019년에는 논문을 2편이나 선보였다. FAST가 개최된 17년간 한국 논문을 보기 드물었던 만큼 노 교수의 활동은 더욱 주목받았다. 게다가 SSD의 출현과 함께 FAST에서 한국 논문의 채택이 시작됐고, 최근 몇 년 동안 그 숫자가 늘고 있다. 이 두 가지가 FAST ’20 프로그램 의장으로 노 교수가 선출된 바탕이 됐다.
노삼혁 교수는 “다소 낙후돼 있던 우리나라의 시스템 소프트웨어 연구가 젊고 유능한 교수들의 등장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며 “이번 FAST 의장 선출이 이런 흐름에 더욱 활기를 가져오길 바라며, 관련 기술이 더욱 성장할 수 있도록 장기적 안목을 가지고 지원해주길 기대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편 FAST ’20은 2020년 2월 24일부터 27일까지 미국에서 열리며, 노삼혁 교수는 구글(Google)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인 브렌트 웰치(Brent Welch)와 함께 행사 전반을 총괄할 계획이다. 노삼혁 교수는 서울대에서 전자계산기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메릴랜드대에서 컴퓨터과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 조지워싱턴대 초빙교수와 홍익대 교수를 거쳐 현재 UNIST 전기전자컴퓨터공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노삼혁 교수와 1문 1답
Q1. 한국인 최초로 FAST ’20 프로그램 의장으로 선출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먼저 간단한 소감 부탁드립니다.
A1. 국내 최초로 이렇게 중요한 자리를 맡게 되어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2016년부터 미국컴퓨터학회(ACM)에서 발행하는 국제 저명 학술지 편집장도 맡았지만, 이번 학술대회의 장(長)을 맡았다는 게 더 큰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컴퓨터 분야에서는 학술대회에서 발표하는 연구결과와 기술 교류가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거든요.
특히 우리나라는 시스템 소프트웨어 분야가 많이 낙후된 상황이었는데요. 최근 젊은 학자들을 중심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는 중입니다. 제가 이런 자리를 맡음으로써 우리나라 시스템 소프트웨어의 발전이 더욱 힘을 받을 기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Q2. 유즈닉스(USENIX)와 FAST 등의 컴퓨터 분야 학술 활동은 대중들에게 조금 낯선 편입니다. 이 협회와 FAST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주세요.
A2. 유즈닉스(USENIX)는 컴퓨터 과학의 많은 부분 중 ‘시스템 소프트웨어’만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협회입니다. 시스템 소프트웨어를 다루는 다른 협회나 학회도 있지만, 유즈닉스가 세계적으로 가장 인정받는 단체입니다. 이 협회에서는 시스템 소프트웨어의 하위 분야를 다루는 다양한 콘퍼런스가 열리는데, FAST는 저장장치(Storage)에 특화된 학술대회입니다. 저장장치는 HDD(Hard Disk Drive)나 SSD(Solid-State Drive) 등을 말하는데요. FAST에는 이 분야의 최근 동향과 발전 방향에 대한 최신 고급 기술이 공유됩니다.
Q3. 저장기술 분야의 동향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현재 연구자나 엔지니어가 가장 주목하는 것들은 무엇인가요?
A3. 최근 10년 정도 저장기술의 발전은 ‘플래시 메모리(Flash memory)’를 중심으로 이뤄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플래시 메모리는 전원이 끊겨도 데이터를 보존하는 특성을 가진 반도체입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기술의 한계로 저장용량이 적고 제어가 힘든 데다 비싸서 많이 활용되지 못했습니다. 주로 자기적 방식으로 정보를 저장하는 플로피 디스크나 HDD가 이용됐죠. 당시 플래시 메모리 연구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드물어서 학회에서 발표할 기회를 얻기조차 어려웠고요.
그런데 불과 10년 사이 플래시 메모리를 비롯한 비휘발성 메모리가 저장장치 기술의 중심에 와 있습니다. 개인용 컴퓨터는 물론 스마트폰, 클라우딩 시스템 등에도 모두 플래시 메모리가 적용됩니다. 특히 삼성전자는 플래시 메모리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SSD 기술을 확보했고, 우리나라는 이 분야에서 기술을 선도하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현재 학계와 산업계에서는 차세대 비휘발성 메모리가 나올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에 맞춘 새로운 시스템 소프트웨어 연구도 필요한 시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Q4. 인공지능(AI)이나 빅데이터 등 소위 4차 산업혁명과 함께 언급되는 기술들에선 데이터 저장이 필수적으로 보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방향성이 있을까요?
A4. 예, 사실 저장기술이 필수적이지요. 그러나 눈에 띄지 않는 기술이라 당연하게만 받아들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맑은 공기가 과거엔 당연했지만 요새 같이 미세먼지 문제가 대두되면서 새삼 맑은 공기의 중요성이 드러나듯 말입니다. 요즘 회자 되는 AI나 빅데이터 등의 기술은 시스템 소프트웨어 발전 없이는 불가능한 기술입니다. 이런 기술 개발들이 탄탄하게 서야 그 위에 다른 기술들이 자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Q5. 우리나라는 ‘IT강국’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컴퓨터 시스템 분야나 저장기술 분야에서는 어떤 수준인지 궁금합니다.
A5.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컴퓨터 시스템 분야에서 국제 수준에 많이 뒤처지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저명한 학회에서 한국 연구자가 발표하는 논문을 찾아보기 힘들었는데요. 최근 3~4년 사이에 우리나라 논문이 나오고 있습니다. 2019년 2월 열린 FAST에서만 한국 논문이 5편 발표됐어요.(이 중 2편은 노삼혁 교수팀의 연구) 이는 유능하고 젊은 교수들이 국내로 들어오면서 생겨난 현상입니다. 시스템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실력 있는 40대 초중반 연구자가 많아졌습니다. 상당히 희망적인 신호죠. 특별히 저장기술은 삼성전자나 하이닉스 같은 국내 기업들이 플래시 메모리를 중심으로 발전하면서 연구도 활발해진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 또는 세계를 이끄는 수준까지 올라왔다고 봅니다.
Q6. 만약 이 분야 연구나 인력 등이 부족한 수준이라면, 어떤 점들이 보완돼야 한다고 보시나요?
A6. 사실 아직도 많이 부족합니다. 이는 세계 수준에 이른 국내 연구자가 매우 한정돼 있기 때문이지요. 시스템 소프트웨어 기술은 진입 장벽이 높은 분야입니다. 프로그램 하나를 운영하는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모든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기존 시스템 소프트웨어인 윈도우즈(Windows)나 리눅스(Linux) 체계를 거의 완벽하게 파악해야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거나 바꿀 수 있게 됩니다. 그만큼 오랫동안 내공을 쌓아야 결실을 얻을 수 있죠. 그러니 이 분야의 정책 입안자나 관리자들께 당장 눈앞의 결과를 보지 말고, 또 그렇게 평가하지 말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기대하고 기다려 달라는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Q7. 학생들에게 컴퓨터 분야의 중요성이나 재미에 대해 전하실 말씀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A7. 앞서 말씀드렸듯이 시스템 소프트웨어 분야는 진입 장벽이 높습니다. 학생들도 마찬가지 생각이 들 겁니다. 이 분야 강의를 들으면 정말 괴로워하거든요. 운영체제(OS) 이론은 물론 복잡한 소프트웨어까지 처음 다루게 되면 굉장히 어렵죠. 게다가 시스템 소프트웨어의 영역 자체가 너무 넓습니다. 실제 시스템에서는 저장장치 하나만 생각해도 너무 큰 부분이거든요. 아이디어를 내고, 그것을 검증하기까지 정말 어려운 고비들이 수도 없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높은 만큼 한 번 오르면 기회가 무궁무진합니다. 리눅스는 지금도 진화 중이며, 어느 한 영역에서라도 공헌한 사람이 되면 소위 ‘부르는 게 값’이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대우를 받게 됩니다.
컴퓨터 과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굉장히 다양하고 창의적인 학문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하고 싶은 모든 걸 창조할 수 있는, “정말 멋진 학문”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Q8. UNIST 전기전자컴퓨터공학부의 장점과 특색을 소개해주신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A8. UNIST는 시스템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대한민국의 최고의 연구진을 갖춘 대학입니다. 연구환경도 잘 구축돼 세계적인 학술대회에 나가서도 한국을 빛내는 역할도 해내고 있죠. 비슷한 분야의 연구자가 근처에 있으니 자연스레 협업도 많고, 서로 발전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학생 교육에도 신경을 많이 씁니다. 1학년 때부터 코딩에 대한 친근함을 길러주기 위한 엔지니어링 프로그램 교육이 개설돼 있고, ‘AI Lab’을 통해 조교들의 꼼꼼한 지도가 이어집니다. 네이버나 삼성전자도 상대하는 시장 규모가 커질수록 시스템 소프트웨어 기술에 신경 쓸 수밖에 없는데요. 이런 날을 대비한 연구개발과 인재 육성이 UNIST에서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