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리나 센서, 신약 등의 재료를 ‘박테리오파지’라는 바이러스로 만드는 기술이 있다. 박테리오파지의 유전자를 조작해 원하는 단백질 분자를 대량으로 손쉽게 만드는 플랫폼으로 쓰는 것이다. 바이러스가 빠르게 대량 증식한다는 특징을 활용하는 건데, 과거 경험에만 의존하던 방식을 개선할 정량적인 데이터가 나와 주목받고 있다.
UNIST 에너지 및 화학공학부의 이동욱–류정기 교수 공동연구팀은 박테리오파지를 이용해 물질을 만드는 플랫폼을 개선할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박테리오파지와 그 표면에 붙는 물질 사이의 상호작용을 정량적으로 측정한 것이다.
연구진은 또 박테리오파지와 탄소나노튜브(SWCNT)를 결합한 물질의 분산성을 산도(pH)로 조절 가능하다는 내용도 밝혀냈다. 이 결과는 박테리오파지를 이용한 탄소나노 소재 제작에 활용할 수 있다.
박테리오파지는 대장균과 같은 세균을 등을 숙주로 삼아 자신의 유전 물질을 빠르게 복제하며 대량 증식한다. 또한 숙주인 세균만 공격하는 특성이 있어 인체에 무해하다. 이런 특징을 이용해 항체나 신약 등에 필요한 단백질을 만들어내는 연구가 많이 진행 중이다. 또 크기가 나노미터(㎚) 수준으로 매우 작다는 점에서 나노 소재 분야에도 활용하려는 시도도 나오고 있다. 박테리오파지 표면에 원하는 단백질 분자를 생성 또는 부착하는 플랫폼으로 쓰려는 것이다.
유전 물질과 그를 둘러싼 단백질 껍질로 단순한 구조를 가진 박테리오파지는 유전자 조작이 손쉽다. 이를 통해 표면에 특정한 단백질 분자를 만들어내거나, 특정 소재와 잘 결합하는 성질을 갖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박테리오파지의 표면 단백질 분자와 다른 분자 사이에 작용하는 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원하는 물질을 정확하게 설계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연구진은 박테리오파지의 한 종류인 ‘M13 박테리오파지’와 ‘5개의 분자 작용기’ 사이에 밀고 당기는 힘을 ‘산도(pH)’를 변화시키면서 측정했다. 여기에는 표면 힘 측정기(SFA)라는 장비가 사용해 아주 가까운 거리에 나타나는 힘까지 분자 수준에서 직접 측정할 수 있었다.
그 결과, 5개 분자 작용기 중에서 페닐기와 박테리오파지 간의 접착 에너지가 가장 높았다. 이는 박테리오파지 표면에 있는 단백질과 페닐기의 고리 모양 탄소 구조가 서로 끌어당기는 힘과 수용액 상에서 소수성 물질끼리 달라붙는 힘 때문이었다.
이 결과를 바탕으로 연구진은 M13 박테리오파지와 단일벽 탄소나노튜브(SWCNT) 간 복합체를 만들었다. 이후 산성 조건에서 박테리오파지가 탄소나노튜브와 더 강하게 달라붙는 걸 확인했다. 둘 사이에 각각 있는 고리 모양의 탄소 구조가 당기는 힘과 소수성 물질인 두 물질이 서로 당기는 힘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박테리오파지 복합체가 뭉치고 흩어지는 힘은 산도(pH) 변화로 조절 가능했다. 산성 조건에서는 박테리오파지 외부에 있는 단백질은 양전하를 띠어 음전하를 띠는 탄소나노튜브에 더 단단하게 달라붙는다. 이 때문에 복합체끼리도 달라붙는 힘이 생겨 서로 엉겨 붙은 현상이 관찰됐다. 반면 염기성 조건에서는 박테리오파지 외부 단백질이 음전하를 띤다. 이 경우 같은 음전하를 띤 탄소나노튜브와 서로 반발하므로 복합체들이 엉겨 붙지 않는다. 이를 응용한다면 산도(pH)를 조절해 박테리오파지에 부착된 물질의 밀집도를 쉽게 조절할 수 있다.
이동욱 교수는 “이번 연구로 박테리오파지를 플랫폼으로 사용해 원하는 단백질을 만들어내는 데 유용한 데이터베이스를 확보했다”며 “박테리오파지와 탄소나노튜브 결합체에 관한 연구결과는 앞으로 박테리오파지를 그래핀 같은 탄소 기반 소재에 응용할 수 있는 자료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번 연구는 국제학술지 ‘커뮤니케이션스 케미스트리(Communications Chemistry)’에 8월 20일자로 공개됐으며,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으로 이뤄졌다. (끝)
논문명: Probing molecular mechanisms of M13 bacteriophage adhe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