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료 전지는 세계가 주목하는 미래 대체 에너지원이다. 수소와 산소의 화학반응으로 전기를 만들어 내는데, 원료가 무궁무진해 고갈 염려가 없다. 부산물은 물뿐이어서 공해 걱정도 전혀 없다. 발전 효율은 기존 발전 장치들보다 훨씬 높다. 세계 과학기술계가 치열하게 상용화 경쟁을 벌이는 이유다.
연료 전지 상용화의 성패는 수소와 산소의 화학반응을 유도하는 촉매 개발에 달렸다. 현재는 백금 촉매가 쓰인다. 그런데 가격이 너무 비싸고, 내구성이 약해 상용화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최근 세계 과학기술계는 그래핀 촉매에 주목하고 있다. 그래핀은 전기 전달능력이 구리보다 100배 뛰어나고, 강도는 철보다 200배나 강한 ‘꿈의 신소재’다.
UNIST(울산과학기술대학교) 백종범(48) 교수(에너지및화학공학부)는 그래핀 촉매 연구 분야에서 세계가 주목하는 선도 과학자다. 화학분야 세계 최고 저널인 ‘케미컬 리뷰(Chemical Reviews)’는 최근호(5월호)에 백 교수를 초청, 전 세계 그래핀 촉매 연구 동향과 향후 연구 방향을 제시하는 특별 논문을 실었다.
케미컬 리뷰는 논문인용지수(IF·Impact Factor 45.661)에서 ‘네이처(Nature, IF 42.351)’, ‘사이언스(Science, IF 31.477)’, ‘셀(Cell, IF 33.116)’ 등 ‘세계 3대 과학저널’로 알려진 매체들보다 영향력이 높다.
※ 논문명: Metal-Free Catalysts for Oxygen Reduction Reaction(산소환원용 무금속 촉매)
http://pubs.acs.org/action/showMostReadArticles?journalCode=chreay&topArticlesType=month
백 교수는 논문에서 기존 백금 촉매를 대체할 그래핀 촉매 연구 성과 및 동향을 소개하고, 연료 전지 상용화를 위한 그래핀 기반의 다양한 무금속 촉매 연구 개발 방향을 제시했다. 이 논문은 케미컬 리뷰가 자체 집계한 ‘지난 1개월간 가장 많이 읽힌 논문’ 톱 5에 꼽힐 만큼 주목받았다.
백 교수는 탄소 결정구조체인 그래핀에 질소, 산소 등 다양한 이종원소를 입혀(도핑) 그래핀 촉매의 활성을 대폭 향상시키는 것에 연구력을 집중해왔다. 이는 자신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그래핀 ‘ball(구슬)-milling(분쇄)’ 기술에 기반하고 있다. 이 기술은 연필심에 쓰이는 흑연을 쇠구슬을 이용해 물리적으로 분쇄한 뒤, 잘게 깨뜨려진 흑연 알갱이에 이산화탄소를 도핑해 그래핀을 대량 생산해내는 방법이다.
백 교수의 볼-밀링 기술은 탄소 원자가 벌집 모양의 얇은 막으로 연결된 구조체인 그래핀의 고유한 형태와 성질을 유지시킴으로써 우수한 전기 전달력과 견고성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했다. 그동안 그래핀 생산과정에서 투입했던 각종 유독물질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친환경 공법이라는 점도 주목받았다. 세계 과학기술계는 “그래핀을 간단하고, 친환경적이며, 저렴하게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길이 비로소 열렸다”고 평가했다.
백 교수는 현재 질소 산소 등 이종원소를 그래핀에 입혀 그래핀에 새로운 특성을 부여함으로써 기존 그래핀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그래핀 신소재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백 교수는 “에너지·반도체는 물론이고 생물학 분야까지 아우르는 전 산업 분야의 소재 혁신을 이끌어내겠다”는 포부다.
이미 세계가 주목하는 성과들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연료전지 그래핀 촉매 가장자리에 준금속인 안티몬을 선택적으로 입혀 전기화학적 활성을 크게 높인 새로운 그래핀을 지난 5월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이 새로운 그래핀 촉매는 10만 번을 사용해도 처음과 동일한 촉매 활성을 유지하는 높은 안정성을 보였다. 세계 과학계는 “영구적으로 사용 가능한 ‘죽지 않는(Die Hard) 연료전지’ 개발의 길을 연 쾌거”라고 평가했다.
앞서 그래핀에 붕소와 질소를 함께 입혀 기존 실리콘 반도체보다 우수한 가격 경쟁력과 안정성을 확보해 그래핀을 반도체 소자로 활용할 수 있는 길을 열었고, 할로겐 원소를 그래핀에 입혀 리튬이온 이차전지의 음극 소재로 활용하는 성과도 거뒀다.
백 교수가 보유한 세계 최고 수준의 그래핀 대량생산 기술은 최근 울산의 중견 기업에 이전돼 본격적인 상업화가 진행 중이다.
■ 백종범 교수는?
세계가 주목하는 그래핀 연구자다. 2008년 UNIST에 임용됐고, 그동안 130여편 논문을 발표했다. 발표 논문은 국내외 4300회 이상 인용됐다. 2011년에 국가기술자문위 우수연구성과 100선, 한국연구재단 우수연구성과 50선에 뽑혔다.
최근 미래창조과학부의 ‘리더연구자지원사업(창의적연구)’에 선정돼 9년 동안 최대 73억원의 연구비를 확보했다. ‘차원조절 유기구조체 연구단(Center for Dimension-Controllable Covalent Organic Frameworks)’을 맡아 그래핀의 한계를 극복할 유기물 구조체를 연구 중이다.
-볼-밀링 공법 연구 결과가 발표된 초기엔 학계의 반응이 냉담했다던데
“막상 발견하고 나니 너무 쉽고 간단한 공정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누구도 쉽게 떠올리지 못한 방법이었다. 그동안 어렵게만 연구해 온 연구자들로선 허탈했던 모양이다.”
-시행착오도 많았겠다.
“흑연 분쇄 방법을 고민하다가 폭발력을 이용해보려고 뻥튀기 기계까지 구입해 실험에 나서기도 했다. 그래서 한동안 학교 수업이 없는 주말마다 연구실은 뻥튀기 기계의 폭발음이 끊이지 않았다.”
-오늘의 성과를 이끈 바탕은 무엇인가.
“한 눈 팔지 않고 최선을 다한 뚝심과 끈기가 결국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그 힘은 궁벽한 산골에서 소몰이했던 유년의 경험이 바탕이 됐다.”
-소몰이 경험은 어떤 도움이 됐나.
“소를 앞에서 몰면 본능적으로 저항한다. 뒤에서 몰아줘야 소가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어 저항하지 않는다. 연구도 성과나 명망에 이끌려 억지로 하는 것은 좋지 않다. 자기 주도로 즐겁게 해야 창의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다. 후배 연구자들이 명심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