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 문을 열자 시큼하고 달착지근한 향이 몰려왔다. 눈앞에는 성인 평균 키보다 훨씬 높은 선반이 여럿 달려 있다. 선반마다 시험관이 빽빽하게 서 있다. 시험관을 하나 빼내 안을 들여다보니 양초처럼 굳어 있는 초산과 호밀가루 주위로 초파리들이 날아다니고 있다.
임정훈 울산과학기술원(UNIST) 생명과학부 교수팀은 초파리 실험을 통해 동물의 행동이 유전적으로 어떻게 조절되는지 연구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관심 있는 분야는 수면과 같은 생체시계다.
“RNA가 생체시계에 영향” 최초로 밝혀
과학자들은 생체시계의 정체를 분자생물학적인 수준에서 밝혀내기 위해 오랫동안 연구를 진행해 왔다. 세포는 DNA 염기서열로 이뤄진 각 유전자의 유전 정보를 RNA나 단백질처럼 생물학적 활성을 갖는 물질로 발현시킨다. 생체시계는 이런 유전자 발현 정도를 일정한 패턴으로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키면서 24시간 주기의 리듬을 갖게 한다. 지금까지 ‘피어리어드(period)’ ‘타임리스(timeless)’ ‘클락(clock)’ ‘사이클(cycle)’ ‘크립토크롬(cryptochrome)’ 등 생체 리듬을 유지하는 데 관여하는 유전자가 여럿 발견됐다.
임 교수는 KAIST 박사후연구원이던 2006년, 동료 과학자들과 함께 생체시계를 조절하는 후보 유전자 ‘cg4857’을 처음 발굴했다. cg4857에 변형을 가하자 피어리어드 유전자의 RNA에서 번역이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면서 생체시계의 주기인 24시간이 26~27시간으로 늘어났다.
임 교수는 “RNA가 번역된다는 뜻은 리보핵산(RNA)에서 단백질이 만들어진다는 것인데, 이를 위해 RNA에 리보솜이 결합돼야 한다”며 “cg4857이 피어리어드의 RNA에 달라붙어 리보솜과의 결합을 돕는다”고 설명했다.
임 교수는 cg4857이 피어리어드의 발현을 조절해 생체시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 착안해 이 유전자에 생체시계 주기인 ‘트웬티포(Twenty-four)’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당시 학계에서는 생체시계가 DNA에서 RNA로 전사되는 과정에만 관여한다는 주장이 우세했다”며 “트웬티포 유전자 연구를 통해 생체시계가 RNA에서 단백질로 번역되는 과정에도 관여한다는 사실을 최초로 밝혀냈다”고 말했다. 그는 이 내용을 2011년 ‘네이처’에 발표했다.
현재 임 교수는 신경유전학 및 리보노믹스연구실을 이끌며 RNA가 단백질을 만드는 과정에 주목해 생체시계를 어떻게 조절하는지 연구하고 있다. 2013년에는 트웬티포가 루게릭병이나 치매 등 퇴행성 뇌질환에 관여하는 ‘어택신(ataxin)-2’ 유전자와 결합한다는 사실도 추가로 알아냈다.
올해 4월에는 어택신-2에 결합하는 단백질의 종류에 따라 어택신-2의 역할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확인해 ‘셀’의 자매지인 ‘몰레큘러 셀’에 발표했다. 임 교수는 “이런 특성이 퇴행성 뇌질환의 발병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 중”이라고 말했다.
[연구실 人사이드] “나와 너는 동료과학자”
임정훈 교수는 학생들을 단순히 제자가 아닌 동료과학자로 생각한다. 공학 분야에서는 기존에 만들어진 제품을 효율적으로 향상시키는 연구가 많지만, 기초과학 분야에서는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는 연구가 많다.
그는 “생명과학 연구를 통해 세포가 갖고 있는 수없이 많은 비밀 상자들을 하나씩 열어 나아갈 때, 그 발견의 기쁨과 과학의 즐거움을 온전히 공유할 수 있는 특별한 동료들”이라고 말했다.
이정아 과학동아 기자 | zzunga@donga.com
<본 기사는 2017년 9월 ‘과학동아’에 “[Career] “생체시계와 치매 그 관계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