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을 연구하는 실험실을 방문한다는 사실에 기자는 몇 시간 전부터 들떠 있었다. 내심 사람 몸통만한 도마뱀이 야자수 사이를 어슬렁거리는 광경을 상상하며 실험실에 들어섰는데, 야자수는 없고 반도체 공정에 사용되는 기계가 우뚝 서 있었다. 그 반대편의 조그마한 채집통에 작은 도마뱀과 개구리가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이게 다…?”라며 당황하는 기자에 정훈의 UNIST 교수가 웃으며 대답했다. “여기는 동물학과가 아니라 기계공학과입니다. 저희는 동물의 습성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독특한 기능을 연구합니다.” 기대는 와장창 무너졌지만 기계공학과 동물의 만남이란 말이 구미를 당겼다. 정 교수는 자신의 연구 분야를 ‘생체모방공학’이라고 불렀다.
털끝까지 따라 해야
생체모방공학은 자연이 가진 신기한 기능을 인공적으로 구현하는 방법을 연구한다. 거미를 흉내 내서 슈퍼히어로가 된 스파이더맨도 어떻게 보면 생체모방공학의 결과물이다. 스파이더맨이 생명공학의 결과물이라면 정 교수는 기계공학을 기반으로 자연을 모방한다.
이 분야의 대표적인 예가 게코 도마뱀이다. 게코 도마뱀은 어떤 벽에도 잘 달라붙는 성질이 있다. 이 원리를 궁금히 여긴 과학자들이 발바닥을 자세히 살펴보니 발끝에 달린 나노미터(nm‧1나노미터는 10억분의 1미터) 크기의 작은 섬모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처음에는 ‘비슷한 구조를 만들면 되겠지’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반도체를 가공하는 기술을 이용해 섬모를 만들었는데 접착력이 부족했다. 다른 분야에 쓰던 공정을 그대로 사용해서는 섬모 끝의 주걱 같이 생긴 구조를 따라 만들 수 없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이 주걱 구조가 접착력의 핵심이었다.
당시 박사과정 학생이었던 정 교수는 기존 반도체 공정에 자외선을 쬐면 딱딱해지는 특이한 재료를 활용해 주걱구조를 똑같이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접착력이 나타났다. 이처럼 자연의 여러 구조물의 독특한 기능은 나노미터 같은 아주 작은 단위에서 나온다. 물에 젖지 않은 연꽃잎도 나노구조를 이루고 있다. 정 교수는 “독창적인 방법으로 남들이 쉽게 만들지 못하는 작은 구조를 만드는 게 연구팀이 가진 최고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나만의 아이디어를 만들어라
만드는 방법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어떤 동물을 따라할지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직접 보는 게 중요하다. 정 교수는 학생 때 실험실에서 연꽃을 직접 길렀다. 기계공학 실험실에서 연꽃을 키우다 보니 웃지 못 할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루는 햇빛이 잘 드는 복도에 연꽃을 내놨는데, 청소 아주머니가 그 연꽃을 쓰레기로 착각해 버린 것이다. 쓰레기장에서 연꽃을 찾아온 정 교수는 전자현미경으로 마지막 연꽃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이런 연구철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학생들에게 실험실에만 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 곤충이든, 식물이든 자연을 눈으로 보라고 말한다. 사정이 안 된다면 앉아서 다큐멘터리나 잡지를 본다. 기자가 묻지도 않았는데 과학동아도 꼭 본단다. 그런 과정에서 남이 발견할 수 없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른다는 것이다. “게코 도마뱀과 연꽃잎을 발견한 사람들이 유명해지자, 그게 뭐가 대단하냐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쉽게 생각할 수 있다는 거죠.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처음으로 아이디어로 끄집어냈다는 것입니다. 저희 학생들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정 교수가 만든 게코 도마뱀 패드는 지금은 반도체 공장에서 활용중이다. 기존에는 반도체 양쪽을 기계가 물리적으로 잡고 있었는데 자칫하면 기판에 균열이 생길 수 있었다. 패드를 사용하고 나서는 이런 위험이 사라졌다. 최근 부쩍 응용 분야에 눈을 돌리고 있다. “지금까지는 연구가 재밌어서 했는데, 앞으로는 실제 산업이나 생활에 적용하는 데 초점을 맞출 예정입니다.”
‘아이디어의 비밀 : 자유와 협동’
다양한 곳에서 아이디어를 얻는 게 중요하다보니 연구실 분위기가 유독 자유로웠다. 연구주제도 정훈의 교수가 직접 정해주기 보다는 학생들이 스스로 선택하게 했다. 고한길(석박통합 3학기)씨는 “하고 싶은 일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찾아서 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라고 말했다. 사진이 취미인 고 씨는 학교 주변의 식물과 동물의 사진을 찍으며 새로운 생각을 떠올린다.
정 교수는 또 학생들이 함께 일하라고 말한다.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이 함께 일할 때 혼자서는 생각할 수 없던 아이디어가 나온다는 것이다. 정 교수도 다른 학과 연구진과 함께 연구를 하고 있다.
송준섭 과학동아 기자 | joon@donga.com
<본 기사는 2015년 6월 ‘과학동아’에 ‘연꽃과 도마뱀 키우는 기계공학자’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