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를 만난 느낌이었다. 그가 가진 학문적 권위 때문이 아니라 그의 말 속에 담긴 통찰력에서 깊은 내공이 느껴졌다. 세속적이고, 상투적인 질문을 던진 기자에게 그는 ‘당신의 열정은 어디에 있느냐’는 화두를 던졌다.
UNIST 자연과학부 스티브 그래닉 특훈교수는 매년 100억 원의 연구비를 지원 받는 기초과학연구원(IBS) 산하 ‘첨단연성물질연구단’의 단장이다. 올해 4월 말에는 미국 국립과학원(NAS) 회원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미국 국립과학원은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 대부분이 회원으로 활동하는 세계 최고 권위의 학술단체다.
세포들의 사회학
물리화학 분야 권위자인 그의 최근 연구 성과는 ‘세포가 물질을 원하는 장소로 운반하는 원리’에 대한 것이다. 물리학이나 화학과는 동떨어져 보이는 연구 내용에 의아해하는 기자에게 그는 “물리, 화학, 생물이라는 구분은 인위적인 것”이라며 “이것은 화학, 저것은 물리학 연구 주제라는 생각으로 제한을 두지 않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이해하려 한다”고 말했다.
학부 시절 사회학을 전공하다가 화학으로 전공을 바꾼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인 그래닉 교수는 자신의 연구를 ‘세포들의 사회학’이라고 표현했다. 대부분의 생물학 연구가 단일 세포 안에서 어떤 현상이 어떤 원리에 의해 일어나는지 알아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그의 연구는 여러 세포가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규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세포들의 ‘사회’를 연구한다는 점에서 그의 연구는 사회학과 같은 맥락에 있다.
‘문과생’이 ‘이과’로 옮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을까. 그는 “누구나 처음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하지 않나”라며 “나이가 좀 더 많았을 뿐이지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고 말했다.
동료에 대한 ‘신뢰’가 성공적인 융합연구 비결
연구 분야에 제한을 두지 않는 그래닉 교수의 철학 때문에 첨단연성물질연구단은 생명현상은 물론 플라스틱을 구성하는 고분자 물질과 기체나 액체 속에 섞여 있는 특정 분자 등 다양한 대상을 연구하고 있다.
폭넓은 분야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비결은 화학과 생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로 연구진을 구성했기 때문이다. 세포가 물질을 적재적소로 운반하는 원리를 밝힌 것도 ‘레비 워크’라는 수학 개념을 알고 있는 연구원 덕분이었다.
레비 워크는 프랑스 수학자 폴 레비가 고안한 개념으로, 목표물을 찾아 움직일 때 처음에는 좁은 영역에서 빈번하게 움직이다가 마치 ‘점프’를 하듯이 한 번에 긴 거리를 이동한 뒤 그곳에서 비슷한 패턴으로 목표물 찾기를 반복하는 방식을 말한다. 꿀벌이나 상어, 해파리 같은 동물들이 먹이를 찾아 움직이는 방식이 레비 워크 패턴이다. 그래닉 교수는 “만약 그 학생이 레비 워크에 대해 몰랐다면 현미경으로 관찰한 패턴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내지 못했을 것”이라며 “그게 바로 융합 연구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정확히 알지 못하는 분야의 전문가를 함께 일할 동료로 뽑을 때 그래닉 교수가 중시하는 덕목은 무엇일까. 그는 “성공적으로 무언가를 해내고자 하는 ‘열정’을 본다”며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방대한 연구 분야를 관리하려면 그런 동료를 신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로 2년째인 한국 생활에 큰 만족감을 나타냈다.
“한국 학생들과 연구자들은 굉장히 진지하고, 정말 연구를 잘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 태도가 참 좋습니다.”
사람이 가장 큰 재산
그래닉 교수는 자신의 연구 성과가 어디에 적용되는지 묻는 질문에 ‘사람’이라는 답을 내놨다. 자신이 가르친 학생들과 동료 연구자들이 기술을 갖고 창업하는 기업가가 되거나 교수, 기자가 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상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연구 성과 자체는 숙성되지 않은 아이디어와 같다”며 “그 아이디어를 쓸모 있게 만드는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 내 연구의 가장 중요한 적용 분야”라고 말했다.
최영준 과학동아 기자 | jxabbey@donga.com
<본 기사는 2015년 10월 ‘과학동아’에 ‘세포들의 사회 들여다보는 융합 연구의 대가’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