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필자는 자동차의 상반된 두 모습을 보았다. 출장을 가는 항공편 기내에서는 태풍 피해를 보도한 신문지면으로부터 아파트단지 내 불어난 물 위에 둥둥 떠있는 승용차의 우울한 모습을 봤고, 파리에 도착해서 곧바로 찾은 모터쇼에서는 정말 더 이상 멋있어질 수 없을 것 같은 미래 세상의 빛나는 컨셉트카를 보았다. 이 둘을 엮는 공통된 키워드는 미래를 보는 눈이다. 미래에 대한 불찰은 흙탕물로 범벅된 침수차로 돌아온 것이고, 끊임없는 미래에 대한 상상과 탐구는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미래차를 내놓은 것이다.
감각에 눈 떠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필자가 보기에 주변에 관한 우리의 감각과 반응은 둔하다. 특히 자신 스스로의 감각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 군중심리에 의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것은 우리가 유행을 좇는 흔한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는 무엇이든 대세를 찾고 선호하는 모습을 갖추고 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타는 베스트셀링 카를 사고, 서점에서 상위에 랭크된 베스트셀러 책, 무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지침서를 산다. 유명인이 가 본 관광지를 찾고, 인기 드라마만 보고, 텔레비전이나 미디어에 소개된 식당이라면 무작정 찾아가고, 그곳에서도 제일 잘나가는 메뉴를 시킨다. 혹자는 유행을 좇는 이런 현상이 곧 우리나라 사람들이 감각적이라는 것을 방증한다는 의견을 내지만, 필자의 관점에서 타인과 다수의 선택을 찾아 몰려다니는 취향은 결코 개성이 있거나 감각적인 것이 아니다.
태풍이 왔다 갔다. 역시 필자의 예상대로 온 나라가 태풍에 대비하지 못한 당국을 비판하느라 일주일을 보냈다. 기상청부터 각 지방자치단체까지 ‘탓’하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다. 거의 모든 종류의 위급상황과 재난에 대해 항상 단골 원인인 정부의 늑장대응부터, 사전 고지의 미흡함과 심지어 재난복구의 속도까지 우리에게는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 하지만 과연 지난 지진처럼, 태풍이 오는 것을 우리는 몰랐을까? 사실은 알고 있었다. 분명히 태풍의 강력함과 진로에 대한 사전정보가 뉴스와 일기예보를 통해 전해졌다. 상식적으로 태풍이 온다고 하면, 폭우가 온다고 하면 무언가 대비를 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우리가 대처하지 못한 것은 스스로 감각의 눈과 귀를 닫고 주변에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내일 태풍이 온다고 하니 우산이나 챙겨야지 하고 넘어갈 뿐, 폭우에 대한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다. 이 얼마나 수동적인가.
차라리 과거에는 더 능동적이었다. 필자가 어렸을 때인 1980년대에는 동네에서반상회를 통해 주민 스스로 매년마다 장마, 태풍에 대비해서 주변을 정리하고 물건들을 결박해놓거나 배수구를 점검하는 등 여러 사전 조치활동들을 했던 기억이 난다. 폭설이 오면 내 집 앞은 물론이요, 동네길을 다 함께 치우곤 했었다. 그러나 21세기 정보의 전달과 공유가 첨단을 달리는 이 시대에 오히려 스스로 눈과 귀를 닫은 우리들은 지진이 나면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고, 태풍이 온다고 하면 어떻게 대처하는지도 모르고, 홍수에 물이 차오르면 어떻게 대처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남탓, 나라탓만 할 뿐이다. 자신의 주관도 없이 주변에 이끌린 극단적 개인주의, 배타적 혐오와 분노의 분출구만을 찾는다. 어떻게 같은 나라 사람으로서, 해운대 고층아파트 지역이 수해가 난 것을 두고 그들이 부유층이라서 그런 피해를 본 것이 고소하다는 인터넷 댓글을 달고 또 거기에 좋아요를 누를 수 있는가. 제발 집단사고에 매몰되지 말고 스스로의 생각과 감각으로 세상을 보자.
엊그제 독일 연방의회에서 통과된 법안은, 2030년부터 모든 내연기관 자동차를 판매금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들은 세계 최고의 자동차와 엔진기술조차 내던지고, 미래 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전기차 개발에 매진하겠다는 무서운 집단들이다. 이런 집단들과 경쟁할 우리는 지금 무얼하고 있나. 정신차리고 감각에 눈떠야 할 때다. 미래의 멋들어진 전기차도 또 독일에게 빼앗길 것인가.
정연우 UNIST 디자인·공학 융합전문대학원 교수
<본 칼럼은 2016년 10월 14일 경상일보 18면에 ‘[경상시론]감각에 달린 미래’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