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과 입학의 계절이 또 돌아왔다.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 그리고 ‘졸업은 끝이 아니고 시작’이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릴 것이다. 부모 노릇을 하다 보니 그 무엇보다도 설레고 기억에 남는 순간은 바로 자녀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첫애의 초등학교 입학식장에서 눈 주위가 뜨거워지던 순간이 기억난다. 기저귀를 떼고, 젖을 떼고, 걸음마를 처음 시작할 때 보다 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왜냐하면 이제 정말 ‘사람’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식을 ‘사람’으로 만드는 데 있어서 부모가 바라는 바는 무엇일까. 바로 자식의 자립이다.
내가 물려준 유전자만으로만 살아남기 어려운 환경이니, 잘 먹여서 건강하게 키우고 위험한 것은 피하라고 가르쳐야 하고 먹이를 구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인류의 진화는 바로 이러한 과정이 포함된, 장기간의 양육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내가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내 자손이 혼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 그리하여 다음 세대의 자손을 재생산할 수 있도록 – 최소한의 능력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자식이 커가면서 걸음마야 할 수 있고, 화장실도 혼자 갈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정글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바깥세상은 얼마나 위험한가.
예전부터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60세 아들이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문 밖을 나서려 하자 80세 노모가 ‘찻길 조심해서 건너라’ 했다고. 자식을 거친 환경에 내 놓기 두려운 심정으로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자식이 6살 때나 60살 때나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걸 잘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내가 국민학교(현재 초등학교) 1학년 들어갔을 때 생각이 난다. 입학 후 어린 막내가 찻길 잘 건널 수 있을까 걱정된 나머지 아버지께서 학교 앞의 횡단보도를 같이 건너시곤 했다. 어느 날 아마 입학 후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일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 손을 놓으면서 말씀하셨다.
“오늘부터는 혼자 건너가라. 아빠는 여기서 보고 있을게.” 나는 순간 당황했다. 심지어 배신감도 느꼈다. 아마도 자전거 타기를 처음 배우면서 뒤에서 손을 놔버리는 부모님의 행동을 경험해본 사람들도 이 감정을 이해할 것이다.
‘나를 보호해주어야 할 아빠가 내 손을 놓는다고?’ 두려운 마음으로 건너다 울먹거리며 뒤돌아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얼굴에는 불안과 긴장이 없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다시 앞을 보고 걸었고 눈물이 나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첫날 이후에는 울지 않았다. 한 번 해보니까 할 만 했다. 그렇게 하나둘씩 부모님 없이 해보면 내가 혼자 서는 것이 그리 두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인생에서 어느 순간 부모님의 손을 놓고 떠나야 할 때를 맞이한다. 이미 내 부모님은 영원히 내 손을 놓으시고 가셨다. 혼자 걸음마 하기, 혼자 자전거 타기, 혼자 자기, 혼자 횡단보도 건너기 등 하나씩 연습해가면서 우리는 차츰 자립을 하게 된다.
부모로서도 자식이 그렇게 자신의 손을 놓고 떠나는 것이 두렵고 서운하다. 그러나 내가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자식을 키우고 싶다면, 독립된 인격체로 만들고 싶다면 손을 놔주어야 한다. 혼자 걸어가다가 넘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손을 잡아줄 수는 없다. 자녀들의 자립의 연습은 부모들이 자식의 손을 놓는 것과 동시에 이루어진다.
졸업과 입학의 계절이다. 이제 자식의 손을 놓자. ‘네 꿈을 펼쳐라’ 하는 말을 하고 싶다면 손을 놓고 뒤에서 미소를 지으며 응시하길 바란다. 자식은 그래야만 위풍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최진숙 UNIST 기초과정부 교수
<본 칼럼은 2017년 2월 15일 울산매일신문 16면에 ‘[사는이야기 칼럼] 처음 횡단보도를 혼자 건너갔던 날’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