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드램프는 말이야, 동물 눈동자 같아야지. 눈이라고 눈. 저렇게 이상하게 생긴 헤드램프가 세상에 어디 있나. 눈동자처럼 동그랗게 고쳐봐” 한 글로벌 자동차기업의 디자인 품평에 떨어진 회장님의 불호령이다. 그 불호령은 ‘회장님 지시사항’이라는 무섭고도 즉각적인 효력을 가진다.
디자이너와 엔지니어가 수년간 개발한 혁신적 형태와 구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어디서 늘 본듯한 둥근 헤드램프로 대체된다. 제 아무리 유능한 디자이너나 디자인부서장도 회장님의 디자인에 관한 비전문적 코멘트에 아무런 대꾸도 못한다. 권위가 직무 전문성에 우선하는 흔한 사례다. 단번의 지적으로 결과를 뒤집은 그 권위자는 스스로 디자인 전문가라 생각할 것이다.
1. 디자인을 좋아하는 것과 볼 줄 아는 것은 다르다. 2. 디자인을 볼 줄 아는 것과 디자인을 할 줄 아는 것도 다르다. 3. 디자인을 할 줄 아는 것과 디자인을 잘하는 것은 아주,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디자인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1부터 3까지의 개념을 구분하지 못한다.
다른 전문영역에 비해 디자인은 일상에 늘 존재하는 까닭에 누구나 좋아하고 쉽게 접근한다. 쇼핑을 해도 기능적이고 아름다운 것, 조화로운 것을 고르는 디자인 선택행위를 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디자인평가자의 시선과 태도가 내재돼 있다. 그리고 일부는 스스로의 권위나 주변인의 동조, 동의에 힘입어 점차 자신을 ‘디자인을 좀 아는’ 사람이라 믿게 된다. 그때부터 곧잘 디자인 전문가적 견해를 내고 행세를 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디자인을 전공하는 일부 학생들이다. 전공이 디자인이어서 전문성에 관한 ‘권위’를 인정받는다. 그러나 아직 디자인의 요소와 원리, 개념과 응용을 다 배우지 못한 그들에게 디자인이란 A 또는 B 중 아무거나 선택해도 상관없는 취향의 대상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 까닭에 유명해진, 디자인을 정의하는 표현이 있다. “디자인은 개취(개인취향)다!” 필자가 제일 싫어하는 표현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디자인은 개인취향이 아니다. 아무리 비슷한 디자인이라 하더라도 결과물간의 수준 차이는 반드시 존재한다. 일반인과 학생들이 구분할 줄 모를 뿐이다. 전문가가 아니지만 스스로 전문가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종종 디자인 관련 의사결정에 잘못된 방향을 잡고, 그릇된 결과물을 얻게 된다.
우리 모두 음식을 좋아한다. 요리 프로그램을 즐겨보고, 요리도 할 줄 안다. 요리솜씨가 꽤 뛰어난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요리를 특급호텔 셰프의 요리와 비교할지언정 그들을 특급호텔 셰프와 동급으로 대하지는 않는다. 일반인이 요리를 잘한다고 해서 셰프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대부분은 음악을 좋아하고, 혹자는 피아노를 칠 줄 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피아노를 잘 친다고 해서, 피아노를 전공한 피아니스트와 동급으로 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즉 피아노를 칠 줄 아는 사람과 피아니스트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마찬가지다. 법전 읽었다고 판검사, 변호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수학공식 배웠다고, 셈을 할 줄 안다고 수학자가 아니고, 물리법칙 몇 개 이해한다고 물리학자, 과학자가 아니지 않은가? 공학서적 한두 권 읽었다고 그를 엔지니어라 말하는 사람은 없다.
이렇게 설명을 통하면 100% 이해되는 ‘직무적 전문성’의 개념은 참 아쉽게도 현실에서 비전문가의 ‘권위’나 자신 스스로 전문가라 여기는 ‘착각’에 의해 철저히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헤어디자이너의 제안을 무시하고 이상한 스타일을 하고 있는지, 엉뚱한 색상 선택으로 인테리어 공사를 망치고 있진 않은지, 각 분야 전문가 의견 다 물리치고 의사결정이나 정책집행을 하고 있지 않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나는 오늘도 수많은 전문가를 물리치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하루를 보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내가 바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프로페셔널 아마추어다.
정연우 UNIST 디자인·공학융합전문대학원 교수
<본 칼럼은 2017년 3월 22일 경상일보 18면에 ‘[경상시론]프로페셔널 아마추어-전문적 비전문가 시대’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