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푸르트 모터쇼를 다녀왔다. 올해의 화두는 전기차 전쟁이다. 메이커마다 새 전기차를 내놓았고, 미디어프리젠테이션은 더 빠르게, 더 많은 전기차를 어떻게 출시하고 개발할 것인가를 발표하는 경연장이었다. 불과 2년전 같은 자리에서 전기차와 하이브리드에 맞서겠다며 클린디젤을 내세웠던 그 메이커들이 올해는 모두 전기차만 이야기하고 있었다. 천지개벽인가?
주의 깊게 살펴볼 것은 너도 나도 전기차를 외치고 있는 메이커 주장이 아닌 현상의 변화다. 엔진과 연료통을 없애고 모터와 배터리를 장착하는 전기화에 의한 새로운 요소들이다. 내연기관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정밀움직임제어가 전기차에서는 가능하기 때문에 자율주행기술의 적용이 더 쉽다. 따라서 전기차의 보급은 곧 자율주행시대의 시작이다.
그렇다면 자율주행차의 보급은 어떤 의미인가? 완성차 제조사와 대부분 사람들은 그저 ‘운전 스트레스가 없는 이동’ 중 ‘휴식’이나 ‘독서’ ‘회의’ 정도의 편의성 향상이라 여긴다. 운전대가 전동으로 접혀 들어가고, 시트를 뒤로 슬라이딩하거나 회전시켜 뒷좌석과 마주보고 앉는 모습을 보여주는 ‘딱 그만큼’이다.
하지만 필자가 보는 ‘자율주행차량 보급의 의미’는 ‘혁명’ 수준의 변화다. 한 예로, 자율주행차량은 속도정밀제어를 통해 차량간 주행 중 도킹(연결)이 가능해서, 내가 이동 중에 라면을 주문하면 셰프모듈이 내차에 도킹해 라면을 끓여주고, 바쁠 때는 뷰티모듈이 와서 머리를 손질해준다. 출근 후 내 차를 주차장에 세워두지 않고, 시내로 보내 택시영업을 시켜 돈을 벌어오게 할 수도 있다. 유치원에 들러 먼저 아이를 픽업해서 집으로 함께 갈 수도 있다. 밤에는 스스로 세차를 하고 충전한 다음 출근 시간에 맞춰 나를 태우러 오게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얼마나 많은 파생사업과 서비스가 생겨날까? 사용자 관점에서 인간을 시공간 3차원 이동의 제약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혁신의 결정체가 바로 전기차-자율주행차다. 겨우 독서나 하고 둘러앉아 회의하는 공간으로 쓰라고 자율주행차가 세상에 나타난 것이 아니다.
창의성의 스펙트럼이 좁은 탓일까? 혁신의 부재는 그 혁신을 만드는 기획자, 개발자와 생산자에게도 있다. 필자가 디자인을 맡아 진행중인 곧 운행을 앞둔 한 국내 광역시도의 자율주행버스개발프로젝트가 있다. 상당수 각 부문 엔지니어들은 물론 심지어 승인과 운행 허가를 맡은 여러 중앙부처 담당자들까지 자율주행버스의 특성을 외면하고 평소 습관대로 업무를 수행하려고 했다. 운전자가 없어도 와이퍼가 필요하고, 전면 시야가 확보되어야 한단다. 스스로 충돌을 피해도 범퍼가 필요하고 안전벨트까지 있어야 한단다.
또 섀시 설계자는 다인승 버스라는 대전제를 무시하고 실내 앞뒤 바닥 위로 불룩 솟은 프레임을 가져왔다. 모 완성차 기업은 아예 시판중인 일반 미니버스를 무인차로 개조해서 쓰자는 제안도 했다. 기가 찼다. 범퍼, 에어백, 안전벨트, 충돌안전 프레임, 고장력 강판같은 거추장스러운 구조와 요소는 더 이상 필요없다. 아무리 자율주행이지만 오작동과 고장가능성 때문에 안전장치는 있어야 한다고? KTX같은 고속전철이나 비행기가 충돌이나 고장, 추락에 대비한 범퍼나 에어백이 있는지 생각해보면 된다.
결국 자율주행차는 과도기를 거쳐 현재의 자동차와 아주 다른 모습을 띨 것이다. 안전벨트, 에어백뿐만 아니라 스티어링 휠, 엔진룸, 차량 앞뒤 범퍼, 심지어 헤드라이트도 없는 매끈한 덩어리 형상 속에 푹신한 쇼파가 있는 라운지의 모습일 수 있다. 4차산업혁명과 3D프린팅, 신소재와 혁신 엔지니어링을 추구하며 엔진룸과 스티어링 휠 달린, 충돌안전기준까지 만족하는 프레임 튼튼한 어정쩡한 요즘차를 만들고 평가하는 아이러니는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 세상은 지금 천지개벽하느라 바쁘다. 혁신적 콘셉트는 혁신의 옷을 입어야 진짜다. 인공지능 첨단 로봇에 상투 틀고 짚신 신기지 말자. 천지개벽도 손발이 맞아야 제대로다.
정연우 UNIST 디자인·공학융합전문대학원 교수
<본 칼럼은 2017년 9월 21일 경상일보 18면에 ‘[경상시론]천지개벽 같은 소리’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