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한 어르신의 상이 있어 크리스마스 연휴 사흘을 꼬박 장례식장에서 보냈다. 많은 조문객들이 고인의 영정을 찾아 예를 갖췄다. 상주집안의 한사람으로 사흘 밤낮 문상객들과 맞절을 수백번하는 동안 문득 한 생각이 들었다. 분향, 헌화, 묵례와 절을 하는 이들 중 실제 고인과 교분이 있던 사람은 얼마나될까? 구순 고인의 빈소를 직접 찾아올 수 있는 친구분은 거의 없을 터. 그렇다면 다들 왜 시간을 들여 단 한번 뵌 적도 없는 고인을 찾아 조문할까? 상주와의 인간관계라는 상호작용때문이다. 상주와 힘든 순간을 잠시나마 공유함으로써 인간관계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는 까닭에 생면부지 고인의 빈소를 찾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고인의 지인과 가족은 눈시울을 붉히고 울음을 터트리는 반면 상주의 지인은 차분히 상주를 찾아 위로하는 모습이 많았다. 전자는 고인과의 영원한 이별에 슬픈 감정이 북받친 마음이고, 후자는 상주를 생각하는 마음이다. 필자는 마음의 경중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조문이라는 같은 행위에도 서로 다른 모습(행위의 결과)을 띠게 만드는 마음의 방향(행위의 목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제자들을 보면 누구는 높은 학점을 받는 것에, 누구는 디자인연구를 통해 뭔가 만들어 내는데 마음의 방향이 있다. 둘다 똑똑하고 성실하지만 결과는 상당히 다르다. 높은 학점이 목표인 학생은 연구주제부터 결과물에 이르는 프로세스 전반에 내용이 꽉채워진 모양새라 흠집을 잡을 부분이 없다. 출결도 좋고 교수의 지시도 성실히 따르지만 결과물의 디자인적 가치나 창의성수준은 대체로 평이하다. 디자인에 열정을 둔 학생은 연구주제부터 결과물까지 좌충우돌에 내용 기복도 심하다. 고집도 세서 교수를 설득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경주하는 ‘에너지낭비’도 마다 않는다.
그러나 결과물은 완성도가 낮을지언정 창의성이나 디자인적 가치는 대체로 뛰어나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시라. 학점관리 잘하고 성실한 학생이 디자인을 못하고, 똥고집쟁이가 디자인을 잘한다는 게 아니다. 둘다 커리어를 쌓고 디자인에서 성공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필자는 그들 마음의 진정성이 디자인에 있는가를 구분할 수 있을뿐이다.
사회에도 비슷한 경우가 많다. 다양한 프로젝트에서 만나는 관계자들 중 어떤 사람은 일정준수, 형식에만 관심을 두고 어떤 담당자는 오로지 좋은 디자인을 도출하는 것에 필자가 미안할 정도로 열정을 쏟는다. 둘 모두 기업, 기관, 정부조직에서 성실한 구성원이지만 한사람은 형식을, 다른 사람은 본질을 중시하는 부류다. 마찬가지로 둘중 누가 낫고 못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마음의 진정성이 누구에게 있고 없는지 보인다는 뜻이다.
새로운 일을 추진할때 늘 부정적인 사람들의 입버릇이 있다. “저도 새로운 것 좋아합니다. 그런데 무슨 규정에 걸려서 안됩니다. 저도 도와드리고 싶은데, 방법이 없네요.” 규정속 깨알까지 찾아 안되는 이유부터 나열하는 사람, 관련규정이 없으면 처음부터 무조건 안된다는 해석을 내는 사람은 아무리 스스로 능동·긍정적이라 말해도 누구나 알 수 있다. 그저 자리보전이 중요할뿐 ‘혁신따위는 개나 줘버려’라는 속마음으로 오늘 하루도 아무 일 없이 넘기고 싶은 복지부동의 무사안일주의자임을. 하지만 어떤 사람은 자신의 업무밖 영역까지 나서서 문제를 풀어주려 노력한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의 마음에 진정성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가치를 공유하고, 상대를 위하거나, 마음을 얻고자 할때, 내가 먼저 갖추어야 하는 것도, 상대가 대해야 하는 것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도 마음의 진정성이다. 마음의 진정성이란 그런 것이다. 변명을 늘어놓으며 공감하고 이해하는 척 하지만 말 못하는 우리 마음의 눈은 이미 상대를 꿰뚫어 본다. 겉치레를 알아채는 정도는 어린아이도 하는데 우리는 속마음을 감추는 것을 예의라 생각하며 하루를 또 허비하고 있다. 예의나 규범을 빙자한 불통은 비극을 낳을뿐이다.
낚싯배, 제천, 이대목동병원, 크레인까지 세월호 이후에도 끊이지 않는 안전사고가 어디 규정이 없어서 터지나? 나의 일, 내 가족의 일처럼 대하지 않는 진정성 없는 마음탓이다. 나만 무사하면 상관없다는 비겁한 마음은 제발 올해를 끝으로 사라지는 기적을 꿈꾸어 본다. 마음의 진정성이 있고 서로 통한다면, 세상만사 안될 일이 있을까? 인류의 삶에 공헌하고, 변화에 앞서려고 숨이 차는 한 교수 나부랭이의 말보따리. ‘해피뉴이어!’
정연우 UNIST 디자인·공학융합전문대학원 교수
<본 칼럼은 2017년 12월 29일 경상일보 18면에 ‘[경상시론]마음의 진정성’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