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하나. 2016년 1학기 고려대는 성적장학금을 폐지하는 실험을 했다. 그 재원을 학생자치 활동에 대한 지원, 저소득층 등록금 및 생활비, 해외 탐방 등 프로젝트 지원으로 다양화했다.
이 중 저소득층을 위한 장학금이 크게 늘었다. 수혜자 비율은 1년 사이에 140 프로가 늘었고, 소득 1-5분위 학생의 경우 등록금 면제, 기초수급자에게는 매달 방학 포함 30만원의 생활비가 지원됐다. 교내 근로를 하면 1.5배 더 높은 시급을 받았다. 이러한 장학금 정책 변화의 결과, 저소득층 학생들은 알바를 줄이고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높아진 학점을 가지고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지원하는 등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성적장학금을 놓친 한 학생은 처음에는 억울했지만 “장학금이 인센티브가 아니라 공부할 기회를 주는 것이란 취지에 공감하게 됐다”고 했다. (“‘알바의 늪’ 없앤 고려대 실험,” <<중앙일보>>, 2월6일자).
장면 둘. 한편 카이스트나 유니스트 같은 과학기술 특성화 대학은 장학금 배분 방식에 관해 상대적으로 논란이 크지 않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과학기술 분야의 인재를 육성한다는 취지하에 전 학부생을 대상으로 등록금을 면제하고 생활비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일정 학점 이상을 유지한다는 조건이 달려있기는 하지만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모든 학생에게 주어지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2017년 현재 등록금보다 장학금이 많은 대학 상위 3위는 포스텍, 카이스트, 유니스트 등 과학기술 특성화 대학이 차지하고 있다.
장면 셋. 며칠 전 인문학 관련 학술대회의 뒤풀이에 참석했다. 대형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석사생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프로젝트에 연구보조원으로 참여해서 장학금을 받고 있는 학생의 불만이 이어졌다. 공부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참여했지만 하는 일은 컨퍼런스 진행보조 같은 허드렛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이런 장학금을 받지 않으면 시급 7천 얼마의 알바를 해야 하니 학업과 연구를 병행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그들은 학부 때 인문학 분야에 특화된 국가 인재를 양성한다는 취지의 어떤 장학금도 받아 본 적이 없는 학생들이었다.
그들을 보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학문의 목적이 돈 자체가 아닌 것이야 어느 분야도 비슷하겠지만, 돈이 없이 공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기에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특히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수학과 과학에 흥미를 붙인 친구들은 국가 정책에 의해 등록금이나 생활비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반면 인문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그런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 공평한 일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특히 공학 분야보다 훨씬 긴 인문학 분야의 석·박사 과정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학문후속세대들에게 빚을 내어 공부하라고 등을 미는 것은 아닌가.
성적우수자를 과학기술 분야로, 기초수급자를 인문학 분야로 유비적으로 생각해 보면 고려대의 장학금 실험은 좀더 의미를 갖는다. 앞서 고려대생이 언급한 것처럼 장학금이 어떤 인센티브가 아니라 공부할 기회를 확대라는 취지라면, 산업 분야와의 연계로 상대적으로 더 풍부한 자금을 가지고 있는 공학 분야와 함께, 혹은 그보다 먼저 인문학 분야에 이를 확대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작금의 시기는 ‘4차 산업’의 깃발아래 공학과 인문학이 사이의 융합 모델을 찾으려는 노력을 전 방위로 펼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제도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인문학의 후속세대가 위축되어 있는 상황에서 융합이 잘 될 수 있을지, 융합이 잘 되더라도 공학에 대한 인문학의 기생이라는 구조 위에 서 있게 되지 않을지 불안하다.
학문 사이의 균형적 발전과 다양성을 확보해야 하는 측면에서 후속세대 양성을 위한 재정적 재분배는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대학 구조조정의 결과로 언젠가 인문학은 학과가 사라지고 교양이라는 이름으로 겉껍데기만 남게 될지도 모른다. 교양과 공학의 융합이 4차 산업을 바라보는 현시점의 비전은 아니지 않은가.
<본 칼럼은 2018년 7월 19일 울산매일신문 26면에 ‘[시론 칼럼] 장학금을 둘러싼 세 가지 장면’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