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서 색과 형을 통한 제스처는 매우 직관적이다. 벌의 노랑 검정 줄무늬는 접근 말라는 경고다. 뾰족한 독침은 경고를 무시하는 자에 대한 응징 수단이다. 무당개구리 배의 빨강 검정 얼룩무늬는 맹독이 있으니 건들지 말라는 뜻이다. 거꾸로 꽃은 빨강, 파랑, 노랑 원색과 아름다운 형상으로 벌과 나비, 동물, 사람의 접근을 유도한다. 이처럼 색상과 형태를 통한 자연의 시각적 신호체계는 인간사회에 기호체계로 작동한다.
소방차가 적색인 것은 비상이니 비켜달라는 의미다. 소방차(빨강)를 포함해 경찰차(파랑), 구급차(녹색) 등 긴급차량 원색경광등의 어필도 같다. 신부가 하객을 압도하는, 꽃처럼 화려한 드레스를 입는 것은 세상 제일 아름다운 여성, 결혼식의 주인공이라는 의미다. 장례식의 검은색은 망자에 대한 애도와 영면을 의미하고, 정장복식으로 진정성의 무게를 표현하는 것이다. 판사의 검은 법복과 높은 의자는 재판정에서 거역할 수 없는 권위를 시각화한 것이다. 단체스포츠경기에서 선수 복장, 사업장 근로자가 입는 유니폼의 의미는 우리는 협동하는 하나의 팀이라는 뜻이다.
시각적 신호, 기호뿐 만 아니라, 내면의 마음가짐도 ‘외모’를 통해 겉으로 드러난다. 중요한 회의나 발표 때의 정장차림은 해당 의제와 발표내용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다. 선을 보거나 데이트때, 최선을 다해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상대에게 내가 이리 예쁜 사람이라는 것을 어필하려는 마음가짐 때문이다.
반대로 슬리퍼와 잠옷, 집에서의 편한 옷차림은 가족이기에 허용되는 것이다. 국내외 출장지 호텔에서 가운과 슬리퍼차림으로 복도와 엘리베이터, 로비를 드나드는 모습이 간혹 보인다. 본래 가운과 슬리퍼는 객실내 전용으로, 가운에 슬리퍼 차림으로 로비를 활보하는 것은 무례다. 혹자는 미국인의 관습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자유로움의 표현인양 이야기 하는데, 사실은 해당 미국인의 예의와 상식이 부족한 경우일 뿐이다.
외양으로 드러나는 모든 것에는 사회-문화의 예가 갖춰진 정교한 시스템이 작동한다. 요즘 직장이나 관공서에서 넥타이를 매지 않는 것은 건강과 지나친 딱딱함 때문이지 예를 버리라는 뜻이 아니다. 눈꼽 낀 눈매와 피부병 도진 얼굴, 가운 없이 반바지 차림 의사의 병원 진료를 신뢰할 수 있을까?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나르는 식당에서 밥이 넘어갈까? 머리모양이 엉망진창인 헤어스타일리스트에게 머리를 맡길 수 있을까? 본인 편한게 좋다며 머리에 아무것도 안 바르고, 아무런 복장으로 슬리퍼를 질질 끌고 회사에, 작업장에, 학교강의실에 나타나는 것은 그 사람이 직원이든 사장이든 학생이든 교수든 예의없음은 기본이요 의식수준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으로 편협된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스티브잡스가 청바지에 검정 반팔 라운드 티셔츠 달랑 입고 프리젠테이션했다고 해서 외모 꾸미기는 허식 아니냐는 바보스런 반문은 제발 그만하기 바란다. 잡스의 청바지와 티셔츠는 발표하는 아이폰을 돋보이게 하는 수준 높은 정교한 무대장치이자 자기브랜드 ‘스티브잡스’라는 아이덴티티를 어필하는 시각적 기호인 것이다. 다시말해 스티브잡스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슬프지만 잡스 아닌 아무개씨가 중요한 자리에 청바지와 반팔 티셔츠 차림으로 떠들어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필자의 아버지는 외식때 늘 검소한 차림새를 고집하시는데 종업원의 작은 푸대접이라도 있을라치면 손님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한다며 내면이 중요타 하신다. 그때마다 아무리 필자의 아버지라도 도저히 편을 들 수가 없다. 처음보는 고객을 겉모습 아닌 내면을 뚫어보고 극진히 대하는 식당종업원이나 호텔벨보이, 백화점 직원이 있을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도인이나 삼라만상의 원리를 다 깨우친 성인이라면 모를까.
디자인을 어떻게 잘할 수 있는지 묻는 사람들이 종종 연구실에 찾아온다. 그때마다 필자는 자신의 외모가꾸기에 신경을 써보시라 답한다. 디자이너에게 외모는 내가 이런 센스, 이런 감각의 사람임을 표현하는 캔버스다. 시각적 어필과 관련된 직업군의 사람들에게 내면+역량의 외면화이기 때문이다. 세계적 예술가나 디자이너 그 누구라도 평범한 외모가 있었던가 생각해 보시라. 자기자신을 어필할 줄도 모르는데, 어떻게 세상만물을 디자인하고 다룰 수 있겠는가. 나의 남다름과 새로움, 창조를 부르짖는 모든 이에게 고한다. 얼마전 동아일보에 쓴 필자의 논지. ‘기능은 형태를 따른다.’ 내면은 외연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정연우 UNIST 디자인·공학융합전문대학원 교수
<본 칼럼은 2018년 8월 21일 경상일보 18면에 ‘[경상시론]기능이 형태를 따른다’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