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공업탑에 적혀 있는 울산공업센터 기공식 치사문에는 다음 문구가 적혀 있다. “제2차 산업의 우렁찬 건설의 수레소리가 동해를 진동하고 공업생산의 검은 연기가 대기 속에 뻗어나가는 그날엔, 국가와 민족의 희망과 발전이 눈앞에 도래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 치사문을 읽을 때마다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을 견인해 온 산업수도로서의 울산의 역할을 되새긴다. 또한, 부모님 세대의 피와 땀으로 지금 우리 세대가 경제적 번영을 넘어 복지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것에 숙연해진다.
그런데 환경 연구자 관점에서 치사문에 언급된 ‘건설의 수레소리’는 소음·진동으며, ‘공업생산의 검은 연기’는 불완전 연소 발암물질이다. 산업화 과정의 반대급부로 울산이 얼마나 심각한 환경오염을 겪었는지,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여서 이 정도로 환경을 개선했는지 울산에 오래 거주한 시민이라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산업활동으로 인한 울산의 환경오염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지금껏 많은 노력을 기울여 환경을 개선했지만, 악취와 미세먼지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현행 법 제도가 강화되고 기업의 환경 윤리가 개선되는데 얼마만큼의 세월이 흘러야 할까?
이처럼 연구 차원에서 고민하는 환경문제도 있지만, 지극히 소시민으로서 경험하고 있는 환경문제가 있다. 바로 층간소음이다. 몇 년 전, 갑자기 전셋집이 팔리게 되어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를 왔다. 결혼 10년 만에 마련한 내 집이다. 저층이라 탁 트인 전망은 아니지만, 나무가 잘 보여서 계절 변화를 쉽게 알 수 있고, 창밖으로 멀찌감치 지나가는 사람들도 보여서 사람 사는 곳 같다. 도로변이라 자동차 소리가 들리지만, 이중창을 닫으면 조용해서 밤에 글쓰기도 좋았다. 그러나 위층에 새로운 집이 이사 오면서 이러한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매주 금·토요일 새벽 1시가 넘어도 들리는 TV 소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이들이 조금 크더니 뛰기 시작한 것이다. 발뒤꿈치로만 뛰는 것 같다. 거실에서 뛰는지, 주방에서 뛰는지, 어느 방향으로 뛰어가는지 알 수 있을 정도다. 같이 아이를 키우는 처지에서 참다 참다가 직접 얼굴을 대하면 감정만 상할 것 같아 아파트 관리실을 통해 몇 번 연락했으나, 번번이 “우리 애들은 안 뛴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내가환청이라도 듣는 것일까?
층간소음 문제는 환경부 소관이다. 국가소음정보시스템에서 이웃 간의 원만한 층간소음 해결을 위한 절차를 알아봤으나, 법적 구속력이 없어서 별로 실효성이 없을 것 같다. 인터넷에는 층간소음에 효과적이라는 우퍼스피커 판매 광고와 사용 후기가 많은데, 층간소음 고통이 오죽했으면 천장에 스피커를 붙이고 복수를 하겠는가.
한편, 층간소음의 주범이 아파트 주민이 아니라 건설사라는 생각도 든다. 대학생 시절 기숙사나 유학 시절 콘도에서는 전혀 층간소음을 느낄 수 없었는데, 유독 귀국 후에 아파트에서 소음이 심하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아파트는 기둥 없이 벽이 천장을 받치는 벽식 구조라고 한다. 건설사들이 공사 기간과 비용을 줄이기 위해 기둥식 구조보다 벽식 구조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벽식 구조가 소음 진동에 취약하다고 한다.
이쯤 되니 위층 사람들보다 건설사가 미워지기 시작한다. 환경오염의 주범은 따로 있고 소관 부처도 따로 있는데, 항상 환경부는 사고 뒷수습만 하다가 욕을 먹는 것이 중첩된다. 오늘도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부착된 ‘공동주택 생활예절’ 공지문을 읽으면서 모든 책임을 아파트를 구입한 소비자에게 전가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최성득 UNIST 도시환경공학부 교수
<본 칼럼은 2019년 2월 14일 경상일보 18면 ‘[경상시론]층간소음, 누구 책임일까’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