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봄이면 항상 파란 하늘을 뿌옇게 만들던 중국 고비 사막에서 불어오던 황사가 연래행사였다. 그 시절 황사는 공해가 아닌 머나먼 이국땅의 모래가 바다 건너 이곳까지 불어온다는 것이 마냥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그 이후 30년이 흐른 지금 어느덧 그 신기했던 모래는 두 딸을 둔 아빠에겐 공포의 대상이 됐다. 인간에게 있어 문명이란 물질적 풍요를 가져오지만 그 부산물에 대한 ‘업’을 지울 수가 없나보다.
최근 장기간에 걸친 ‘최악’의 대기오염 경고 때문에 성냥갑 같은 아파트에서 층간소음으로 부처처럼 지냈던 아이들에게 희소식이 찾아왔다. 다름 아닌 미세먼지가 ‘보통’이라는 것이었다. 우리 가족은 모처럼 이산가족을 만난 양 반기며 그 ‘보통’의 삶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오랫동안의 감금생활(?)에 오죽 답답했을 아이들을 위해 민속촌이라는 곳으로 마실을 나갔다. 학창 시절 수학여행 이후 처음 가보았다. 자본의 첨단화를 달리는 대한민국에서 민속촌을 어린 시절의 그것으로 기대했던 나는 너무 순진했던 걸까? 초가집, 기와집 등등 민속을 대표하는 옛것들엔 유료 체험과 파는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민속촌 한 구석은 놀이동산이 차지하고 있어 과거와 현재의 묘한 공존에 어색함을 감추기가 힘들다. 그 순간 줄타기 공연 안내가 흘러나왔다. 줄타기 공연은 그대로겠지… 그런 호기심에 어느덧 줄타기 공연장 제일 앞줄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한다.
줄타기 광대가 아찔한 높이에서 하늘을 가로지르는 줄 위로 걸어가며 등장한다. 그리곤 반대쪽 기둥에 몸을 기대며 한마디 한다. “이보슈, 내가 여기서 ‘줄타기’를 하면 나도 힘들고 여러분도 재미가 없을게요. 그래서 우리 다함께 즐길 수 있는 ‘줄놀이’를 해봅시다! 시작해볼까요?” 그 이야기를 듣고선 불현듯 줄타기를 하고 있었던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동안 ‘삶’이라는 줄타기를 하면서 언제 떨어질까, 다치면 어떡할까, 혹시라도 떨어져 사람들이 야유를 보내며 어쩌나 하는 그런 불안과 걱정 속에 살아왔던 것 같다. 관객들이 광대의 멋진 줄놀이에 박수와 응원을 보내는 동안 나의 머릿속은 과거와 현재의 나에 대한 우울한 회상으로 가득 찼다. 그런 이면에는 걱정을 달고 사는 나의 성격 탓도 있겠지만 때론 실패하거나 낙오하면 큰 일 난다는 그런 ism(주의)이 나를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닐까? 군부독재시절부터 이어져온 ‘협박’을 통한 사회 구성원의 관리와 통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우리 사회는 태어나면서 부터 학창시절, 사회생활,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까지 ‘하세요’, ‘하면 좋아요’보다 하지 마세요’, ‘하면 큰일나요’ 주의에 둘러싸여있다.
필자의 오랜 유럽 경험은 한국의 여러 것들에 대해 비호감을 증대시킨다. 유럽의 도로에서 그러한 ‘협박’의 교통표지판을 본 적이 없다. 사망지점은 꽃다발들이 놓여있고, 도로공사로 밀리는 정체구간 1km 이전부터 200-300m 간격으로 점점 웃음이 커지는 스마일맨 임시 표지판들을 만날 수 있다. 또한 음주운전 예방 캠페인으로 “누가 봅이에요?” 사인을 볼 수 있는데, “지금 파티가고 있지? 누가 봅(일행 중 한명이 술 안 마시는 운전기사)이야?” 물어보고 있다. ‘안전벨트를 안 매면 사망률 증가’가 아니라 딸아이가 아빠의 목부터 허리를 두 팔로 안고 있는 사인을 노르웨이에서는 쉽게 볼 수 있다. 우리 사회 전반에 팽배해있는 패배와 실수는 죽음이라는 문화,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 협박의 문화 속에서 무엇을 즐길 수 있을까? 이제는 잠시 숨을 돌려 국가, 기업, 단체는 구성원들의 패배, 실패와 실수를 안아줄 때가 아닐까? 줄타기 광대의 묘기에 노심초사하며 그의 실패와 실수에 불평하고 비판하기보다, 예기치 않은 실수에 박수를 보내는, 관객과 광대가 하나가 되는 사회가 되기 위해선 가진 자들의 멋진 관객역할이 필요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광대는 줄놀이가 끝났음을 선언하지만 관객들은 앙코르(광대는 가수가 아닌데도)를 계속 외쳐대고 있다. 광대도 관객도 모두 다 아름다운 모습이다. 이렇듯 긍정의 미학은 어려운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나의 삶이, 우리 자식들의 삶이, 우리 모두의 일상이 ‘줄타기’보다는 ‘줄놀이’가 돼 보기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기대일까? 미세먼지의 ‘보통’이 고마운 것처럼 그런 줄놀이가 ‘보통’으로 우리의 일상에 자주 찾아왔으면 좋겠다.
김차중 UNIST 디자인 및 인간공학부 교수
<본 칼럼은 2019년 3월 25일 울산매일신문 18면 ‘[매일시론] ‘줄타기’와 ‘줄놀이’’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