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라는 가요가 유행했다. 정말 세상이 왜 이런지 모르겠다. 테스 형은 “뭐라고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정의(正義)는 분명히 존재한다”라고 했다. 그러나 요사이 정의가 무엇인지 정말 모르겠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혼돈스럽다. 작년 말에 시작된 코로나 팬데믹은 아직도 그 터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미 100년 전에 유행했던 스페인 독감만큼이나 오래 유행하고 있다. 언제 어떤 바이러스가 또 나타날지 모른다. 미국도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3주가 지난 지금도 극심한 후유증을 겪고 있다. 트럼프식 포퓰리즘은 심판을 받았지만 아직도 세계 도처에 포퓰리즘 정치가 판을 치고 있다. 여기에 미·중 무역 분쟁, 대북 관계는 우리의 불확실성을 더 증폭시키고 있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비정상적인 일로 과거의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
‘불확실성의 시대’의 저자로 잘 알려진 존 갤브레이스는 저성장 아래 물가가 오히려 상승하던 1970년대 중반의 스태그플레이션 시대를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규정했다. ‘사회를 주도하는 지도 원리가 사라지고… 우리가 진리라고 여겨 왔던 많은 것들과 합리성과 이성에 근거한 담론 체계도 의심스러우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혼란의 시대’라고 했다. 현재는 당시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되는 초(超)불확실성의 시대다. 정의가 무엇인지 혼란스럽고, 포퓰리즘으로 민주주의가 변질되고, 담론 체계는 합리성과 이성보다 감성과 선동으로 얼룩지고 있다. 기존 패러다임으로 보면 너무나 혼란스럽다. 그러나 이러한 초불확실성이 새로운 ‘노멀’로 돼 가고 있는 듯하다. 마치 이제는 코로나19와 싸우기보다는 함께 살아야 하는 것처럼. 인간 지혜로 이해되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에 접어들었다. 앞으로 인공 지능이 세상을 어떻게 더 바꿔 나갈지 현재의 지식으로는 예측하기 힘들다. 불확실성이 일상화돼 가고 있는 것이다.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말을 유행시킨 갤브레이스도 막상 이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이전 저서인 ‘미국의 자본주의’에서 제시한 그의 대표적 이론, 길항력(拮抗力, counterveiling power)에서 해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길항력이란 원래 정치학에서 사용된 용어로 권력이 한 곳에 집중되지 않도록 상호 견제하고 대항하는 힘을 의미한다. 갤브레이스가 이 개념을 경제에 적용했다. 어떤 한 경제 체제의 의사 결정이 반대쪽에서 이루어지는 또 다른 의사 결정과 짝을 이루어야만 그 경제의 지속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힘겨루기를 통해 특정 경제 집단의 독점을 막고 성장과 안정 간의 균형이 성립된다고 했다. 거대 기업의 가격 횡포는 그 반대편에 있는 거대한 구매자의 힘으로 견제할 수 있다. 그래서 기업의 길항력은 다른 경쟁 기업이 아니라 외부에 존재하는 고객이다. 수요와 공급도 상호 길항력을 이룬다. 과다한 수요로 가격이 올라갈 때 공급도 이와 짝을 이루어 늘어나면 가격은 안정된다.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은 서로의 길항력으로 균형을 유지한다. 가격을 과도하게 통제하면 시장은 길항력을 잃고 실패한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정부와 국민, 양자가 길항력을 가지고 균형을 이룰 때 정치는 안정을 이룬다. 견제하는 길항력이 없으면 정치 시장도 독과점이 된다. 그래서 정치 수요자인 국민이 길항력을 가지고 정부의 독과점을 견제해야 한다. 3권 분립도 민주주의의 대표적인 길항력이다. 그러나 국회와 사법부가 모두 정치에 휘둘리면 길항력을 잃고 권력 집중이 일어난다. 사회에 불의가 만연할 때도 이에 대항하는 길항력이 있어야 한다. ‘사회적 분노’가 불의를 막을 수 있다. 10년 전 ‘분노하라‘는 책으로 프랑스에 분노 신드롬을 일으켰던 스테판 에셀은 사회적 불의에 대해 침묵하지 말고 분노하라고 역설한다. 건전한 시민의 분노가 불의에 대해 길항력의 역할을 한다. 분노가 정의를 실현한 역사는 무수히 많다. 프랑스 시민 대혁명, 부정선거로 폭발한 4·19 혁명, 신군부 독재에 항거한 6월의 민주 항쟁, 모두가 불의에 대항한 사회적 분노의 표출이다.
‘세상이 왜 이래’에 대한 테스 형의 대답은 무엇일까. 대화법을 주로 썼던 소크라테스 형이 답을 줄 것 같지는 않다. 그의 뒤를 이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답을 찾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을 중시했다. 그중에서 중용이 최고의 덕이라고 했다. 용기가 지나치면 만용이 되고 부족하면 비겁이 된다. 진실이 부족하면 거짓과 위선이요 지나치면 허풍이다. 갤브레이스가 이를 경제에 적용하면 중용은 길항력쯤 될 것이다. 너무나도 혼돈스러운 이 시대에 아리스토텔레스 형이 답한다. 이제 좌든 우든 편 가르기식 흑백 논리를 버리고 중용의 덕을 가지라고. 합리성을 잃어버린 초불확실성의 시대, 우리 모두 제정신을 찾아가야겠다.
정구열 유니스트 기술경영전문대학원 명예교수
<본 칼럼은 2020년 11월 24일 부산일보 22면 ‘[중앙로365] 너무 불확실한 세상’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