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가 지긋지긋하게 마르지 않던 장마철이 올해는 유난히 짧았다. 소나기가 열대지방의 스콜처럼 내린다. 이웃한 일본은 오래 전부터 이런 습한 기후로 고통 받았다고 한다. 여름철 일본을 여행해본 분들은 아마도 섬나라 특유의 한국보다 더한 끈적끈적한 습함과 불쾌함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장마가 길고 비도 더 많이 내린다. 특히, 다습한 기후 그리고 목조주택이 많아 곰팡이에 특히 민감하다. 그들에겐 바람과 햇볕이 곰팡이 제거의 최고의 방법이다.
더구나 공중보건에서 아주 중요한 살균 효과를 위해 자외선이 있는 햇볕 아래 널어 빨래를 말리는 방법을 수고스러움에도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일본의 주택가를 거닐다 보면 발코니에 널려 살균되고 있는 빨래들을 쉽게 볼 수 있는 이유다. 하지만, 이웃나라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는 인구밀도가 높고 거주공간이 넉넉하지 않아 대부분이 아파트나 주상복합, 그리고 원룸에 살고 있다. 베란다가 없는 그 공간들은 빨래를 널 공간조차 마땅치 않기 때문에 자연 건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어느 집을 가봐도 흉물스러운 구조의 빨래건조대를 거실에서 마주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좁디좁은 집의 일부를 멋지지도 않은 빨래건조대와 공유하며 살아가고 있다.
어릴 때부터 마당 빨랫줄에 빨래를 너는 것만 보고 자란 필자에겐 빨래건조기는 딴 세상 이야기였고, 대학을 위해 상경을 했던 90년도 초반에도 빨래건조기는 일부 상류층에게만 국한돼 있었다. 대학시절 자취를 했던 터라 통돌이 세탁기 하나로 모든 의류를 관리했었다. 입을 옷이 많지 않았던 대학시절 소개팅이라도 하는 날이면 전날 빨래한 옷이 덜 말라서 아침부터 헤어 드라이기로 바지와 셔츠 구멍에 뜨거운 바람을 불어넣기 일쑤였다. 세탁기 한대, 그 위에 매달린 철제 빨래건조대, 세탁세제통들이 전부인 그 좁은 다용도실에서 매일 빨래를 하고 말리는 것이 힘겨웠다.
그러했던 필자는 네덜란드로 유학을 가면서 신세계를 경험했다. 한여름 잠깐을 제외하고 일년 내내 비가 와 습한 그곳에서는 학생기숙사든 원룸이든 빨래건조기는 필수품이었다. 그곳에서는 빨래 말리는 행위가 더이상 고역이 아니었다. 필자가 살던 집에는 개인용 세탁기와 건조기가 함께 있어 공동빨래방이 만원이면 친구들이 한가득 빨래를 들고 우리집으로 놀러오곤 했다. 세탁기만 있다면 빨래하러 올 수 있지만 수분을 머금어 몇배로 더 무거워진 젖은 빨래를 다시 집으로 들고 간다는 것은 상상하기 싫은 고역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만약 외로웠던 유학시절 빨래건조기가 없었다면 그런 친구들을 만나고 사귀는 것은 불가능했으리라. 이런 추억에 잠겨있자니 갑자기 빨래건조기가 고마워진다.
오늘날,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는 삼신가전인 식기세척기, 로봇청소기와 더불어 빨래건조기도 필수로 꼽히는 시대가 됐다. 아파트라는 거주 환경의 보편화, 그리고 바빠진 일상과 고통스러운 미세먼지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건강 이슈, 그리고 그 결과로 휴식 공간으로서 집에 대한 기능이 변화하고 있다. 빨래를 밖에 너는 것을 꺼리게 되면서 빨래건조기는 빠르게 우리의 필수 가전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특히, 빨래건조기는 건조대가 차지하던 공간의 시각적 공해를 없애고 거실다움으로 되돌려주었다. 빨래건조기에서 방금 나온 따뜻하고 보송보송한 그 촉감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촉각은 물론 후각적 감동을 줄 만큼 강력한 것이다.
하지만, 어느새 그 경험에 익숙해지면서 더이상 감동적이지 않게 됐고, 이제는 빨래건조기가 토해내는 빨래들을 개는 번거로움에 투덜거린다. 이를 재빨리 눈치 챈 일부 가전기업들이 빨래 개는 가전을 국제가전쇼에 선보이고 있지만, 이런 현상을 보고 있자면 인간의 욕망에 끝이 안 보인다. 자동 빨래 개는 가전이 대중화된다면 결국 개어진 옷을 정해진 서랍에 차곡차곡 넣어 주는 로봇을 궁극적으로 바랄 것이다. 미안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세상은 안 왔으면 좋겠다. 인간에게 있어 일정량의 육체적 노동은 장수와 정신 건강에 큰 도움이 된다는 연구결과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고 하니 특히 그렇다.
현대사회의 안락하고 쾌적한 집 안 환경을 조성해주는 대표적인 가전제품이 된 빨래건조기는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1799년 프랑스인 뽀숑(Pochon)의 손에서 탄생했다. 최초의 건조기는 공장 노동이 많아지면서 늘어난 빨래를 빨리 말리기 위해 드럼통에 많은 구멍을 뚫고 드럼통 아래에서 불을 피워 빨래가 타지 않게 손잡이로 드럼통을 돌리는 형태였다. 이 직화 방식은 화재의 위험과 옷감이 타는 것 외에도 연기 냄새가 옷감에 베이고 그을음이 묻는 문제들도 발생했다. 이후, 미국의 로스 무어(Ross Moore)는 그의 어머니가 노스 다코타(North Dakota)의 혹독한 겨울에도 집밖에 빨래를 널어야 하는 것을 보고 헛간에 기름으로 불을 피워 회전드럼통을 가열하는 빨래건조기를 최초로 만들게 된다. 그는 이후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1935년 전기로 작동되는 빨래건조기를 발명하게 된다. 이 기술이 미국의 대형 가전회사들에 팔리면서 1941년부터 빨래건조기가 미국의 빨래방에 처음 설치돼 사용되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가전업체들이 본격적으로 건조기 시장에 뛰어들면서 가정용 빨래건조기는 북미에서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빨래를 바깥에 너는 것을 꺼리는 서유럽 문화의 영향으로 빨래건조기의 미국 내 보급은 빠르게 확산됐다. 역사적으로 빨래는 하인들의 일이었고, 하인들이 하던 천한 일을 백인들의 거주 공간에서 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큰 거부감으로 작용한 듯하다. 1990년대까지 미국에서 빨래를 외부에 널어 말리는 것이 마을의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이웃들 사이에 다툼이 자주 일어났다. 그 영향으로 외부에 빨래를 널어 말리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일부 주들에서 발의되고 채택된 경우도 있었다.
믿기 힘들겠지만, 샌프란시스코에서는 2019년 10월이 돼서야 야외 빨랫줄 설치 금지 규정이 폐지됐다고 한다. 실외에서 빨래를 말리려는 것 때문에 미국에서 이웃지간에 심지어 살인 사건까지 일어났다고 하니 빨래건조기가 인류의 평화에도 기여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미국에서 빨래건조기의 보편화는 빨래건조기에 넣어도 되고 또한 덜 구겨지는 옷들을 선호하게 됐고 그 결과 정장을 제외하고는 일상에서 다림질을 필요로 하는 옷을 자주 입지 않게 됐다고 한다.
아시아 지역에서 세탁기는 폭넓게 보급돼 있으나, 빨래건조기는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 느린 편이다. 이 지역에서는 공중보건이 사회적 이슈라 빨래를 집 밖 햇볕 아래 널어 말리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없고, 좁은 주택 구조와 문화적인 차이, 그리고 전기 요금에 대한 부담이 보급이 더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일본의 자회사였던 종합열기기 전문업체 린나이가 1990년대 초 가스로 작동되는 빨래건조기를 국내 최초로 시판하게 된다. 이후, 금성사(현, LG전자)가 2004년에 빨래건조기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한국에서 빨래건조기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시기는 2016년 이후의 일이다. 이 시기에 1인 가구와 같은 새로운 가구 형태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고 미세먼지로 인한 대기오염, 그리고 전기요금 누진제 완화가 빨래건조기 보급 확산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빨래건조기의 내부는 의류를 담는 드럼통, 건조 과정에서의 수분을 모으는 물통, 건조 과정에서 나오는 이물질과 먼지를 거르는 필터, 건조로 인해 습하고 뜨거운 내부 공기를 냉기와 접촉시켜 열을 방출하는 열교환기로 구성돼 있다. 그리고 크게 에어벤트(열풍배기방식), 콘덴싱(열풍제습방식), 히트펌프(저온제습방식) 세가지 방식으로 작동된다.
에어벤트 방식은 공기를 데워 의류를 말리고 이때 발생된 습기와 먼지를 건조기 외부로 배출시킨다. 콘덴싱 방식은 에어벤트와 같으나 습기와 먼지를 빨래건조기 내부에서 해결하는 것이 차이점이다. 특히, 발생된 열을 배출시키는 대신 내부에서 다시 사용할 수 있어 전기요금이 덜 더는 잇점이 있다. 히트펌프 방식은 에어컨과 같이 냉매를 사용하지만 에어컨의 작동원리를 반대로 적용한 것으로 뜨거운 바람 없이도 습기만 빨아들여 옷감 손상이 적고 제일 전기가 덜 먹는 장점이 있다.
빨래건조기는 열을 내는 에너지원에 따라 분류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전기를 쓰느냐, 도시가스를 쓰느냐에 따라 그 특성이 나누어지기도 한다. 2016년 전기요금 할증제가 완화되고 에너지 효율이 좋아지면서 전기식 빨래건조기가 점점 대세가 되고 있다. 참고로, 가스식 의류건조기는 가격이 저렴하고 빨래를 빠르게 건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초기 가스배관 설치비용이 들고 옷감이 전기식에 비해 잘 상하는 단점이 있다.
요즘 세탁기와 빨래건조기 광고를 보면 두개가 분리돼 일이층으로 쌓여있다. 좁은 거주공간을 고려하면 세탁과 건조가 동시에 가능토록 한대로 되면 더 좋을 거 같은데 말이다. 그러한 세탁과 건조를 통합하는 시도가 있었지만, 일체형으로 만들 수는 있어도 기술적으로 빨래건조기의 성능을 소비자들이 기대하는 눈높이까지 맞추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한다. 미국이나 유럽의 전통적인 빨래건조기 가전업체들 조차 일체형을 만들지 않는 것에는 다 그런 이유가 있는 것이다.
빨래건조기는 특히 털이 잘 빠지는 반려동물들을 키우는 사용자들에게서 점점 많이 선호되고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고양이와 살다 보면 침구와 옷에 늘 고양이 털이 수북이 붙어 있다. 고가/고효율의 유명한 진공청소기를 구입해 사용해봐도 구석구석 숨어있는 털들을 완벽하게 제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매일매일 바쁜 직장인들에게는 쉬는 날 빨래를 몰아서 하는 날이면 많은 옷들을 거실에 널어야 해 더욱이 털들로 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고 하니 빨래건조기가 털 달린 반려동물인들에게 진정한 삼신가전인 것이다.
미래의 빨래건조기는 초음파, 전자파 등의 새로운 기술을 활용한 것들이 등장해 한편으로 에너지 효율을 높이면서 시간을 절약하고 동시에 옷감 손상을 최소화하는 빨래건조기가 곧 등장할 것으로 기대된다. 동시에 의류의 옷감들 또한 스마트해지면서 먼지가 덜 나오고 건조가 덜 필요하게 되면 빨래건조기의 기능과 사용자경험 또한 새롭게 디자인 돼야 할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현재의 빨래건조기가 열을 이용해 건조를 하는 만큼 아무리 에너지 효율이 높다고 광고를 해도 에너지 친화적일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 선조가 햇볕에 빨래를 널듯이 태양열을 활용해 새로운 건조 방식들도 기술적으로 고려되고 있다고 하니 기후변화의 시대에 반가운 소식이다.
한국의 집들은 좁고 불편한 다용도실에 세탁기를 몰아넣고 빨래가 끝나면 거실에서 빨래를 널브려 놓고 말리고 개고…. 우리 삶에 아주 중요한 세가지 요소 의식주 중에 ‘의’를 관리하는 공간에 대해 사실 우리는 너무나 박하다. 빨래건조기가 지금은 세탁기가 놓인 다용도실 같은 공간에 동거를 하고 있지만 반드시 그럴 필요가 있을까? 세탁과 건조를 위한 공간과 드레스룸이 통합된다면 옷을 벗고 샤워하고 그 옷을 샤워실 옆의 통합된 공간에서 빨고 건조하고 옷장에 잘 걸 수 있다면 그것도 바쁜 우리들에게 전혀 새로운 경험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주방에 세탁기와 빨래건조기가 함께 있는 경우도 많은데 음식/요리 냄새와 세탁/건조 행위는 사실 서로 대립되는 이모션이라 사용자경험 측면에서 나쁜 조합이다.
이러한 현실과 다르게 우리는 자주 영화 속에서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과 따스한 햇살 아래 마당에서 빨래를 너는 아름다운 모습을 목격하곤 한다. 그 장면들 속에서 파란 하늘을 가로지르는 긴 빨랫줄에 몸을 맡긴 채 바람에 흩날리는 옷들을 보고 있자면 마음의 위안과 평화를 얻는다.
하지만, 현실은 오염된 대기와 비좁은 공간으로 인해 그런 위안은 상상으로만 그친다. 스페인, 이태리, 포르투갈과 같은 남유럽 여행을 할 때면 그곳 사람들의 집 창가 그리고 집들 사이로 널려있는 빨래들이 바람에 아름답게 날리고 있다. 서유럽 사람들이 혐오했던 이런 풍경은 사실 ‘여유’와 ‘평화’ 그 자체를 상징하는 듯하다.
빨래건조기가 삼신가전으로 불리고 그것으로 인해 삶이 더 편리해지고 있다지만, 기후변화와 대기오염으로 인해 미래에 더이상 화창한 햇살아래 바람에 나부끼는 형형색색의 빨래들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문득 서글퍼지는 것은 너무 지나치게 감상적인 걸까?
김차중 UNIST 디자인학과 교수
<본 칼럼은 2021년 8월 2일과 3일 울산매일신문 14면에 각각 ‘[특별연재] 인간, 기술 그리고 디자인 <5> 빨래건조기 상’, ‘[특별연재] 인간, 기술 그리고 디자인 <5> 뻘래건조기 하’라는 제목으로 연재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