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시작한 새 자동차디자인 프로젝트로, 곧 중동 바레인을 다녀오게 된다. 그 프로젝트의 클라이언트는 필자가 한국인인 것을 참 좋아한다. 처음 미팅 때 한국인은 근면 성실하고, 정직하고 착하기 때문에 프로젝트를 맡기는 데 전혀 걱정이 안된단다. 땡큐. 나라덕에 일이 수월하게 됐다. 내가 대한민국 국민인 게 뿌듯했다.
한국인의 특성을 그리 좋게(?) 인식하게 된 이유를 물었다. 클라이언트의 대답은 중동의 인프라 건설과정에서 한국기업, 한국인들의 역할이 매우 크기 때문이란다. 1970년대부터 이미 50년 넘게 쌓인 ‘코리안 컴파니’ ‘코리안’의 긍정적 이미지는 절대적이다. 아버지세대와 선배세대의 노력 덕분이다. 감사합니다.
미팅에 동석한 일본인 디자이너가 있었다. 그를 의식한 덕담(?)인지는 모르지만, 클라이언트의 다음 발언이 그만 필자의 가슴을 후벼팠다. “한국의 건설과 개인의 성실함은 세계 탑이다. 그런데 설계와 제품 품질은 항상 일본이 한단계 더 위다. 설계는 일본, 시공은 한국, 감리를 다시 일본이 하면 핵폭탄에도 끄덕 없는 건축물이 나온다”고 했다. 어쨌든 ‘디자인’을 내게 맡겨준 클라이언트에게 굳이 토 달지 않았지만, 딱히 그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그 ‘항상 한단계’ 라는 단어가 참 아팠다.
K팝, K드라마, K푸드, K컴퍼니-엘지, 삼성, 현대, 기아, K방역, K스포츠-손홍민까지 세상을 다 접수할 것 같은 우리나라는 세계 누구에게나 대접받는 자랑스러운 수준이 됐다. “그런데 말입니다.” 필자의 클라이언트처럼 대한민국과 선진국 사이에는 여전히 격차가 존재한다. 해외의 많은 조사에서 여전히 일본이 가장 첨단 이미지, 스마트한 사람들의 국가로 나온다. 우리가 이제 한물갔다며 그토록 폄하했던 일본 자동차, 토요타는 어느새 GM, 폭스바겐을 제치고 압도적 세계 1위 자동차 기업이 됐다. 토요타 캠리는 수십년째 베스트셀러다. 일본차에 대한 미국과 서유럽, 동남아까지 소비자신뢰는 거의 신앙 수준이다. 전자산업은 망하지 않았냐? 천만의 말씀이다. TV, 냉장고, 세탁기로 대표되는 소비자 가전은 노동집약적 생산구조다. 인건비가 높은 선진국은 한국, 중국 및 개발도상의 제3국에 비교열위일 수밖에 없다. 일본 전자기업들은 전문제품, 첨단설비, 미디어산업 등으로 20년전부터 사업 포트폴리오를 변경했다. 가전제품 매장에 일본브랜드가 사라진 것일 뿐, 음악 영화 등 멀티 미디어 산업에서 소니의 손 닿지 않는 곳이 없다. 음향, 영상 장비부터 디제이 장비까지도 고부가가치를 내는 각종 전문가용 제품군에서 일본 기업들의 위치는 독보적이다.
일본의 소재부품 수출 제한 조치에 우리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산업육성과 공급선 다변화, 탈 일본화 등으로 우리가 대응하고 성공한 듯 자평했다. 실체는 아직도 우리 소부장으로 완전 대체에 수많은 시간이 걸린다. 다양한 공급선이라는 것도 결국 일본기업의 해외공장에서 가져오는 수준이라는 사실은 우리 언론이 잘 알려주지 않는다. 반도체 생산 설비, 자동차 공장 로봇, 크루즈선 같은 고부가가치 조선까지 언급할 필요도 없다. 필자가 진행중인 작은 건축물 프로젝트에 들어가는 시스템 창호조차 디자인-설계-내구 조건을 충족하는 국산제품이 없어 유럽제품을 써야 한다.
우스갯소리로 세상에서 일본을 만만하게 보는 나라는 한국 뿐이라는 말이 있다. 손자병법의 ‘지피지기 백전불태’처럼 스스로를 먼저 살펴여 한다. 우리 근대가 피식민체제를 통과해온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안타깝지만 민족감정과는 별개로 보자. 19세기부터 지구를 선진국과 나머지로 나눈 근대 문물의 핵심은 기초-응용 과학과 공학, 정밀기술과 설계, 디자인과 문화다. 이들이 어디에서 오고 어디에 있는가를 외면하면서 최첨단, 국산화, 세계 최고를 외친들 공허할 뿐이다. 천지개벽 했다는 21세기, 현대기아 전기차가 히트 치며, 망한다던 테슬라는 여전히 독주 중이고, 니콘과 캐논의 노광 장비로 만든 삼성TV를 보고, 다이슨이나 다이슨 유사디자인 청소기로 거실을 밀고 있으니 말이다. BTS나 오징어게임, 손흥민이 자동차로, 제품으로 기술로도 얼른 나오기를. 그래야 중동 클라이언트한테 뭐라 반박도 좀 하지.
정연우 UNIST 디자인학과 교수
<본 칼럼은 2022년 9월 20일 경상일보 15면 ‘[정연우칼럼 아웃사이트(9)]대한민국의 국격과 국뽕’ 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