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에서 158명의 희생자가 발생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습니다. 사건 당일 저도 연구실 학생들이 가지 않았을까 걱정했습니다. 졸업생들은 괜찮은지, 학교 전체적으로는 어떤지 신경이 쓰였습니다. 다행히 우리 학교에는 피해자가 없었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기에 안타깝고 그들의 가족, 친구, 동료들이 안쓰럽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원인을 철저히 파악하고 시스템을 개선하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우리 사회는 자주 그래왔듯이 비난의 대상을 찾기 위해 애를 씁니다. 스위스치즈처럼 조금씩 구멍이 난 부분들이 계속 겹쳐져서 큰 사고가 난 것인데 마치 악의를 가진 악당이 존재하는 것처럼 존재하지 않는 범인을 찾습니다. 이런 인지 오류가 만들어낸 혐오와 분노는 사회의 회복을 지연시킵니다.
압박감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자살을 합니다. 만약 그들에게 잘못이 있더라도 죽음으로 갚아야할 정도의 책임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세월호때 구조되었다가 심리적 부담감에 목숨을 끊은 교감 선생님이 떠오릅니다. 심지어 희생자에게 왜 서양 명절에 놀러 가고, 성인인데 위험도 감지하지 못했냐고 비난을 합니다. 유족의 마음이 더 아파집니다.
백화점이 무너져 사고를 당했을 때 근무자와 쇼핑객은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할까요. 다리가 무너질 때 출근을 하던 사람과 놀이공원에 가던 사람은 희생의 무게가 다를까요. 잠깐 휴가 나온 군인이 친구들과 놀러갔다면 어떨까요. 국가와 사회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을 대우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반대로 쉬거나 논다고 배척돼야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불필요한 공격과 비난이 우리 스스로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닌지 들여다봐야 할 것입니다.
장례비와 지원금, 국가애도기간 등 논란이 끊이지 않습니다. 사회의 회복을 위한 과정에서 그 방식도 적절한지 돌아보게 됩니다. 대형 재난에서 사회는 개인을 도와야 합니다. 그래야 나도 힘들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안전감이 생기겠죠. 위험지역에 여행을 가서 난 사고에도 세금이 쓰입니다. 심지어 범죄자를 위한 교정시설에도 세금이 쓰입니다. 유족 중에는 희생자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하던 가정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각종 행사가 취소돼 음식을 버리게 된 상인이나 공연을 준비한 예술가나 학생들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취소하는 것만이 해결책이었을까요? 묵념을 하고 행사를 진행하는 것은 어땠을까요. 저희 학과에서는 학생들을 위해 핼러윈 행사 겸 진로설명회를 준비했다가 사고로 모임 성격을 조정하는 방향으로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글씨가 없는 검은 리본을 달라는 공문만큼이나 특정 단체의 희생자 전체 명단 공개는 획일적이어서 배려가 부족합니다. 만약 유족들의 뜻을 모아 만든 명단이었다면 그들의 회복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가장 배려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가까운 가족을 잃은 사람일 테니까요.
우리는 가장 힘든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명단 공개도 이 원칙을 따른다면 가장 먼저 고려하는 것은 고인의 뜻일 것입니다. 피해자가 대부분 청년들이라 유언장 같은 것이 없겠죠. 그러니 유족의 뜻이 차선일 것입니다. 슬픈 사고를 당했을 때 그들이 새로운 상황에 잘 적응하도록 도와야합니다. 고인을 추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런데 지원금 결정시기와 금액 공개, 국가애도기간으로 인한 행사 취소, 동의 없는 명단 공개 등이 유족을 돕는 쪽으로 작용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각종 논란과 이로 인한 일부 공격적인 사람들의 표현들이 유족을 더 괴롭히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상담가가 유족의 애도 과정을 다룰 때도 고인의 이름을 직접 언급해도 되는지 아니면 다른 호칭을 사용하길 원하는지 유족에게 물어본다고 합니다. 둘만의 사적인 공간에서도 유족의 마음을 배려하는 섬세함입니다.
지난 주말은 저희 누나의 기일이었습니다. 가장 힘들 사람이라면 배우자를 잃은 매형일 것이지만 동양 문화권에서는 자식을 잃은 부모의 고통 또한 상당합니다. 성인이 아닌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양육자가 사라진 것이니 이 또한 충격이고요. 아버지는 어머니가 힘들어하신다며 당신과만 함께 묘소에 가자고 하십니다. 매형은 아이들과 다 같이 모이면 더 울적할 것 같으니 다른 날 보자고 하십니다. 조카들 중에도 묘에 가면 너무 울 것 같아 기일에는 가지 않겠다는 아이가 있습니다. 우리 가족은 가장 힘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기일을 보내려 노력했습니다.
누군가는 장례식장에서 곡소리를 내야 편할 것이고 누군가는 기도문을 외워야 편할 것입니다. 언젠가는 감정을 표현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고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그 속도와 과정은 다를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회에서 회복이 더 잘 이뤄질 것입니다.
정두영 UNIST 바이오메디컬공학과 교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본 칼럼은 2022년 11월 18일 경상일보 15면 ‘[정두영의 마음건강(32)]이태원 논란-애도의 방식’ 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