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모든 것은 사필귀정이다. 결국은 정확한 평형(equilibrium)을 이룬다. 아니, 이미 정확한 평형에 있다. 사람의 인생은 생각하고 행동하는 대로 만들어진다.
나는 인생의 큰 방향 결정 순간에, 앤을 위해 타협을 했다. 지금도, 앤을 위해 교과서 공부를 더 한 것과, 도서관에서 연구논문들을 더 읽을 수 있었던 것 둘 중에, 어느 것이 나의 인생에서 더 옳거나 효과적인 것인지 모른다. 게놈은 완벽한 정보의 평형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3차원 분자의 정확한 평형에 의해 그 정확성이 보장된다. 게놈의 평형은, 세포의 평형에 기준이 되고, 세포는 조직의 평형을 이룬다. 조직은 신체 전체의 평형을 이루고, 정신과 사상의 평형을 이루게 한다.
# 英 과학, 철학의 근원이자 사회 시스템 뼈대
영국의 대학을 다니면서 배운 것 중 색다른 것은 과학기반 “문명”이 무엇인가 였다. 영어권 문명의 한 축인 영국의 학문계는 독자적인 사상과 사고 체계를 가진 살아있는 문명의 정신 역할을 한다. 문명은 성장하는 벽돌건물과 같다. 벽돌들이 오랫동안 차곡 차곡 쌓인 것이다.
그 벽돌들은 체계와 설계에 맞춰져 있고, 끊임없는 검정과 유지보수를 받는다. 이 과정이 영국만큼 정밀하게 이뤄지는 곳을 나는 보지 못했다.
영국 문명의 특징은 과학이다. 영국에서의 과학은 철학의 현대말로, 하나의 사회내의 영역이나, 분야가 아니다. 철학의 근원이고, 사회시스템의 뼈대이다. 문명은 과학기술의 방법론에서만 가능한 것이며, 진화역사에서의 게놈의 성장과 같은 원칙하에 있다.
나는 게놈은 단순한 유전정보 덩어리가 아닌 ‘생명현상의 문명화’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지구상의 거대한 건물이나, 도시와 같은 종류의 과학기술적 패러다임이 만든 진화적 결과물이다.
영국의 대학에서 박사학위과정은 학사과정에서 우수한 학생들만 지원이 가능하게 돼있다. 영국은 잘하는 사람을 우대해주는 엘리트 교육이 근간을 이룬다. 잘하면 계속해서 고속 진학과 성장이 가능하다. 영국 대학원은 학부과정 마치기 1년 전에 지원을 한다.
# 철저한 신용사회 … 신뢰성 있는 전문가 추천
학부에서의 최종 학업평가를 받기 전에 박사학위를 지원하는 것이다. 평소에 공부에 관심이 있고 좋은 평가를 꾸준히 받아온 학생들만 학부과정의 지도교수들의 추천을 받고 대학원 지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국은 철저한 신용사회다. 모든 사회적 평가와 경력은 신뢰성 있는 전문가들의 추천에 의해 진행된다. 나는 평소에 최고의 시험성적 평가를 받지 못했다.
다만 일부 교수들에게만 수업시간의 질문, 질문에 대한 답변, 에세이, 세미나 참석, 토론 등에서 내가 학업을 충실히 한다고 느껴지는 학생이었을 것이다.
1학년에서 3학년 때까지의 성적표로는 내가 대학원에 진학하는 게 쉽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대학원 진학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어떤 대학원을 갈지에 대한 생각은 없었다.
다만, 죽을 때까지 노화연구를 최종 목적으로 한 생명과학 연구를 하겠다는 것이 확실했고, 어느 대학의 연구소이든 내가 관심 있는 연구 문제를 다루는 곳만 생각했다.
내 인생을 어떻게 전개할지에 대한 큰 그림이 있었고 성적, 상장, 학벌, 돈 때문에 내 인생의 방향이 결정되지 않았다. DNA와 단백질 등 분자구조를 더 깊이 연구하고 싶은 열정 때문에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했다.
<본 칼럼은 2023년 4월 11일 울산매일신문 “[박종화의 게놈이야기 (9)] 영국 대학원 진학 시스템”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