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역사를 쓸 때, DNA문자를 쓴다. 1953년 케임브리지의 크릭과 왓슨이 로잘린 프랭클린과 모리스 윌킨스의 엑스레이 결과를 도용해 이미 알려져 있던 2중 나선 식의 DNA모델을 제시한다. 크릭은 2중 나선 구조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DNA의 정보가 서로 짝을 이루면서 저장되어 있고, 반쪽의 선들이 갈라지면서 복제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설사 양쪽의 선들이 서열이 다르더라도 서로 상호보합적이라서, 동일한 정보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크릭은 생명체에서 정보의 흐름에 가장 큰 의미를 두고, 그 이후에도 RNA의 코드를 밝히는데 공헌을 했다. 현재 코돈(codon)이라는 말도 크릭과, 시드니 브레너 (Sydney Brenner)와 미국의 벤지어 세이무어가 만들어 낸 말이다. 생명체는 코드를 갖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생명학은 정보학이라는 것을 제시한 것이다. 하지만, 1953년 DNA구조가 밝혀졌을 때에도, DNA 의 서열을 제대로 밝혀내는 기술은 없었다.
크릭과 왓슨이 있었던 케임브리지 MRC 센터에 크릭과 비슷한 나이 때의 한 연구자가 있었다. 케임브리지대 생화학과를 졸업한 부유한 집안 출신의 조용한 성격의 프레드 생어 (Fred Sanger)였다. 생어는 막스 퍼룻쯔가 세운 케임브리지 MRC 센터에서 생화학실험을 많이 하였고, 나중에 “염기”연구그룹을 만들고 그 실장이 된다. MRC 센터의 실장 (group leader)은 교수를 말한다. 그러나, 케임브리지대학의 교수보다도 되기 어렵고, 연구소에서 엄청난 지원을 하며, 연구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케임브리지대학에 강의를 요청 받으면 자기가 하고 싶은 만큼만 해주면 된다. 그런 환경에서 생어는 인슐린 단백질의 서열과 구조를 밝히는 방법을 만들어서 1958년 첫 번째 노벨상을 받는다. 1980년에는 하바드대의 월터 길버트와 같이 DNA 서열을 해독하는 방법으로 두 번째의 노벨상을 받는다.
생어는 처음으로 DNA게놈을 가진 “파이 X 174” 라는 바이러스 게놈을 해독하고 나서, 두 번째로 우리 세포내의 에너지를 생산하는 미생물인 미토콘드리아의 게놈을 해독했다. 미토콘드리아는 16,500 개 정도의 염기를 가지는데, 그 안에 RNA와 단백질을 만드는 수십 개의 유전자가 있다. 그러나, 생어가 처음 미토콘드리아 게놈을 해독했을 때, 몇 개의 유전자가 있는지, 또, 있다고 생각된 유전자가 정말로 단백질로 발현되는지를 몰랐다. 그래서, 생어는 존 워커에게 미토콘드리아를 깨어서, 그 안에 있는 단백질을 전기영동 같은 방법으로 다 분리해 내달라고 했다.
그 뒤 존 워커는 수 십 년간 세포 내에서 단백질을 분리하는 작업을 한다. 결국 1997년에 미토콘드리아에서 ATP라는 에너지와 관련된 주요한 분자를 만드는 F1ATPase라는 단백질 구조를 밝힌 공로로 노벨상을 받는다. 존 워커는 생어가 단백질체학(Proteomics)를 창시했다고 한다. 2001년경에는, 질량분석기 (mass spec)가 도입되어서, 수천 개의 단백질을 동정(identification)하고 있었다. 질량분석기는 단백질을 조각 내서, 그 조각들을 수집한 것을 단백질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정보와 비교하여, 어떤 단백질이 있는가를 분석하는 것이다. 따라서, 생정보학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본 칼럼은 2023년 7월 4일 울산매일신문“[박종화의 게놈이야기 16] 크릭과 왓슨과 DNA모델”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