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명한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이 유사 과학에 빗대어 언급한 ‘화물 숭배 (Cargo Cult)’. 화물 숭배는 비행기 모형을 만들어 놓고 비행기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이, 겉으로 보이는 것만 모사해 동일한 결과를 얻고자 하는 헛된 희망을 빗대어 표현하기 위한 은유로 흔히 활용돼 왔다.
화물 숭배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기원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군은 멜라네시아 일대의 섬들을 임시 주둔지로 활용했다. 그곳의 원주민들은 하늘에서 거대한 날개 달린 물체가 우렁찬 괴음을 내며 내려와 앉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그 안에는 라디오, 시계, 통조림 등 처음 보는 진기한 물건들이 가득했고 이들은 이런 것들을 노동의 댓가로 받아 쓸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군대가 떠난 후에도 몇몇 부족들은 여전히 하늘에서 커다란 비행물체가 도착하면 그러한 물건들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이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비행기와 화물을 끌어들이기를 희망하며 모의 활주로, 그리고 관제탑 및 무선 장비의 모형을 만들고 풍요의 복귀를 기다렸다. 이런 믿음을 화물숭배(Cargo Cult)라고 한다. 물론, 그들의 이토록 상세한 복제에도 불구하고, 화물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 전 한 공학자로부터 유니스트와 같은 과학기술원에 재직하는 인문학자의 역할에 대한 제언을 들었다. 내가 자의적으로 해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마디로 자신의 학술적 영역을 넘어서 이 사회에서 이름을 떨칠 수 있는 역할을 하라는 쓴소리였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과연 그게 인문학자들만의 역할일까? 라는 의문도 든다.
지식인으로서의 교수의 역할이라면 인문학 외에 다른 분야에도 모두 해당되므로 전문 지식이 자신만의 학술적 공동체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의무는 같지 않을까 싶다. 어찌 되었든, 이와 같은 ‘왜 할 일을 제대로 안하고 있느냐’는 고마운 비판에 대한 한마디의 변명을 하자면, 필자는 지난 14년 동안 유니스트에서 재직하면서 인문학자들에게 요구되었던 것은 ‘이 사회에서의 역할’보다는 ‘1년에 논문 몇 편’이라는 필수 요건들이었다는 점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공학의 영광을 함께 취하고자 공학의 방식을 모방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인문학자들 자신이 이에 순응한 것도 사실이다. 오늘날 인문학자들은 변화하는 세계와의 관련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과학 기술 분야가 지배적인 학문적 지형에서 일부 인문학자들이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 자원의 감소 및 지적 고립감에 직면한 그들은 필사적으로 공학의 관행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화물 숭배자들이 비행기의 내부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채 비행기의 모양만 모방했듯이, 인문학자들은 공학 분야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표면적인 측면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추세는 인용 지수에 의존한 인사 관리, 연구 방법론에 전산의 적용, 학술적 글쓰기에 공학에서 영감을 받은 전문 용어의 채택 등에서 나타난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 속에서, 일부 인문학자들은 그들 자신의 독특한 기여를 소홀히 할 위험을 감수하는 것 같다. 인문학의 본질은 세상을 향해 지속적으로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는 비판적 사고, 문화적 해석, 그리고 인간 경험의 탐구에 있다. 공학으로부터 연구를 향상시킬 수 있는 도구를 얻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인문학의 본질적인 가치를 무색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인문학자들은 지금과 같은 생성 AI의 시대에 더욱 더 인간이란 무엇인가,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인문학자들이 이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인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지고 답하려는 노력을 통해 이 사회에 귀중하고 독특한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칼럼은 2023년 7월 19일 경상일보“[최진숙의 문화모퉁이(3)]화물 숭배 (Cargo Cult)와 인문학자의 역할”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