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연구중심대학 육성을 위해 ‘연구중심대학 2.0’ 모델을 제안한다. 핵심은 연구 몰입 환경 확충이다. 대학은 연구자들이 첨단 연구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최고의 연구 장비와 지원 인력을 제공하는 ‘플랫폼’으로의 진화가 일류 연구중심대학으로 가는 길이다.
왜 2.0인가? 현재 모델이 1.0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연구중심대학의 시초는 1973년 개교한 한국과학원(KAIS)이다. KAIST의 전신인 KAIS는 국내에 ‘연구를 통해 교육한다’는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입학생에게 상당한 급여와 병역특례까지 제공해 유능한 젊은이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국내 과학기술 발전의 사명을 안고 귀국한 교수에게 배우며 연구할 기회에 파격적 혜택까지 더해진 KAIS는 당시 이공계 인재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1999년 출범한 BK21 사업은 KAIST 모델을 국내 대학 전반에 확산하는 시도였다. 대학원생 급여, 병역특례, 해외연수 기회 제공 등을 통해 연구 환경 전반을 혁신하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KAIS에서 BK21로 이어진 모델이 우리나라의 ‘연구중심대학 1.0’이다. 과감한 지원으로 우수 인재를 육성하고, 우리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현재 모델은 한계에 봉착했다. 원인은 연구 몰입 환경 제공의 실패에 있다.
현재 모델의 핵심 문제는 연구자 개인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연구자들은 연구비 수주부터 장비 구매, 관리까지 연구 외의 많은 업무를 부담하고 있다. 연구비 규모의 확대로 연구자의 역할은 더 커졌다. 연구자에게 가중되는 부담만큼 연구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다른 위기는 대학원생 유입 감소다. 90년대 초부터 이어진 대학원생과 박사 후 연구원의 급여 정체와 병역특례 효과의 희석은 국내 대학원 진학 유인을 줄였다. 특히 유능한 이공계 인재들에게 국내에 남아 연구를 계속할 이유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연구중심대학 2.0 시대, 대학은 어떤 플랫폼이 되어야 하는가. 최고 연구중심대학 중 하나인 MIT를 보자. MIT가 보유한 첨단 장비의 규모도 놀랍지만, 더 주목할 것은 장비를 관리하는 매니저의 존재다. 모든 장비에 전문 관리자가 있고, 이들은 최고의 실험 결과 배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학생의 장비 사용법 교육까지 도맡아 연구자들을 든든히 지원한다. 해외 대학에서는 연구비 관리와 대형과제 제안서 작성을 전담하는 지원 인력도 풍부하다.
MIT에는 교수 1인당 약 11명의 지원 인력이 있다. 국내에서 사정이 가장 나은 KAIST도 3명이 채 되지 않는다. 연구의 우수성은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에서 나온다. 첨단 장비와 풍부한 지원 인력은 결과의 차이를 만들 수 있다.
플랫폼으로의 전환과 함께 연구자 처우 개선도 시급하다. 국내 대학원생은 최저 임금보다 적은 월급으로 학업을 이어가고 있다. 박사 후 연구원도 평균 연 4000만 원의 급여를 받는다. 미국 주요 대학의 절반 수준이다. 일반 회사와 비교해도 넉넉하지 않다. 이들 연구 인력의 급여를 최소 1.5배 인상하는 방안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젊은이들이 목표로 삼을 만한 과학기술자 롤모델을 만드는 지원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연구를 잘하는 사람은 큰 보상을 받는다’는 명제가 실현될 때 과학기술자를 희망하는 아이들이 자란다. 석좌, 특훈교수 제도나 국가과학자처럼 탁월한 연구자를 인정하고 보상해야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다.
플랫폼 조성과 연구자 지원을 위해 가장 중요한 건 대학의 재정이다. MIT는 교수 1000명에 3조 4000억 원의 예산을 운영한다. 국내에서 사정이 낫다는 KAIST는 교수 650명에 약 1조 원이다. 교수 1인당으로 계산하면 절반도 안 된다.
재정의 규모뿐 아니라 성격에도 차이가 있다. 미국 주요대는 대규모 발전기금의 과실금 비중이 높다. 따라서 대학 본부의 자율적 투자와 연구 몰입 환경 조성이 유리하다. 반면 국내 대학들은 연구비의 비중이 크고, 본부가 자율로 활용할 예산이 적다. 우리가 연구 몰입 환경 조성에 실패한 구조적 이유다.
우리 대학의 재정 개선을 위해 세 가지 방안을 제안하고 싶다. 우선 대학에 주는 기초연구비를 단계적으로 증액해야 한다. 2021년 기준 국내 대학이 수행한 기초연구 예산은 전체 국가연구개발 예산의 3.6%에 머물렀다. 같은 기간 미국은 7.1%였다. 장기적으로 지금의 2배 수준인 7% 정도까지 비중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이제 우리는 산업화를 따라잡기 위해 응용연구에 집중하던 것에서, 중장기적 미래를 준비하는 것으로 대학의 역할을 전환해야 한다.
둘째 대학의 연구 몰입 환경 조성을 위한 연구 간접비 정률제 도입이다. 현재의 간접비 제도는 복잡한 요율 계산 방식과 기관의 매칭 부담 등으로, 대학 본부의 자율적 재정 활용을 어렵게 한다. 간접비를 일정 비율 확고하게 배정하면 본부의 자율성이 늘어나고, 연구 몰입 환경 조성과 연구자 처우 개선의 기회가 획기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세계 선도 연구중심대학 프로젝트(World Leading Research University Project)’와 같은 기획으로 세계적 연구중심대학 육성을 위해 과감하게 지원하는 방안을 제안하고 싶다. 세계 랭킹 100위 내 대학 10곳 육성을 목표로 10개 대학에 연간 200억 원 규모의 예산을 지원한다면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확신한다.
UNIST의 사례는 좋은 예다. 2009년 개원한 UNIST는 지자체의 전폭적인 기금 지원으로 첨단 연구 장비를 집적해 연구지원본부를 구축했고, 이를 중심으로 세계적 석학을 유치해 탁월한 연구성과를 창출하며 짧은 기간에 주목할 대학으로 성장했다. 과감한 투자와 연구 플랫폼의 힘이었다. 그러나 장비는 시간이 지나면 낡고, 지원 체계는 끝없는 고도화가 필요하다. 플랫폼이 약해지면 연구자가 떠난다. 지속적인 투자가 이뤄지지 않으면 경쟁력 약화는 명약관화다. 지금 UNIST는 앞서가기보다 뒤처지지 않길 먼저 고민한다. 총장이 마주한 현실은 그만큼 절박하다.
전 세계는 이미 일류 연구중심대학을 확보할 방법을 찾고 실천하고 있다. 우리도 연구중심대학 2.0을 향해 과감히 나아가야 한다. 대한민국에서 세계를 선도하는 연구중심대학을 더 많이 만날 수 있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