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몸 안에는 수만 개의 유전자가 존재하고, 그 모든 유전자는 23쌍의 염색체 속에 들어 있다. 게놈(Genome)은 염색체에 담긴 유전자를 총칭하는 말. 이 게놈 안에 인류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인류가 끊임없이 던졌던 질문, ‘우리는 어디에서 왔나’, ‘얼마나 오랫동안 질병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에 대한 답 역시 게놈 안에 있다. 자, 이제 게놈을 들여다보자.
생명과학의 종합 예술, 게놈
생명과학부 박종화 교수가 꿈꾼 것은 항노화가 아닌 ‘극노화’였다. 노화에 저항하는 것을 넘어서 아예 극복하고 싶었던 것이다. 답을 얻기 위해 연구를 시작했고, 마침내 ‘게놈’을 건드리지 않고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게놈 전문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잠깐, 게놈이란 대체 무엇일까?
“게놈은 인간이 가진 유전자의 총합이에요. 인체 DNA 속에 포함돼 있는데, 유전자는 인간의 생로병사를 결정하기 때문에 한마디로 ‘인간 존재의 설계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UNIST 게놈연구소를 이끌고 있는 박 교수는 이 분석 분야의 세계적 석학이다. 최근 게놈은 영화와 문학작품은 물론 TV 프로그램에서 언급되며 화제에 오르고 있다. 박 교수는 이런 뜨거운 관심이 게놈 분석 비용이 낮아진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게놈은 이미 생물학 분야에서 중요한 관심거리였습니다. 다만 분석 비용이 비쌌을 뿐이지요. 최근에는 100만 원이면 자신의 게놈 지도를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얻을 수 있는 가치는 어마어마한데, 가격이 저렴해지면서 혁신이 생기고 응용 가치가 올라갔습니다.”
게놈(Genome)이라는 단어는 독일 함부르크 대학의 식물학자 빙클러가 1920년에 유전자(Gene)와 염색체(Chromosome)를 합쳐 만들어냈다. 박종화 교수는 이 게놈을 스마트폰에 비유했다. 스마트폰 안에 온갖 IT 기술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게놈에도 온갖 생명과학 기술이 다 들어가 있어 ‘생명과학의 종합 예술’과도 같다는 것. 인체의 게놈을 분석하려면 어떤 정보들이 필요할까?
“모든 것이죠. 많을수록 좋습니다. 키와 몸무게는 물론 신체 특징, 병력, 가족 유전 등을 비롯해 취향과 성향, 성격 등 가능한 한 많은 정보가 필요합니다.”
박 교수가 현재 가장 관심을 두는 분야는 질병과 희귀병 및 난치병 연구다. ‘병’을 고쳐야 인류가 꿈꾸는 무병장수의 꿈에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이다. 게놈 분석은 이런 인류의 꿈을 도와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도구이다.
“제 목표는 사람들의 방대한 건강체 정보를 모으는 겁니다. 전 세계 70억 명의 게놈을 다 분석해보고 싶습니다. 이를 통해 인류에 대해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인류의 ‘극노화’에도 한 발 가까이 다가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 교수는 그러려면 국내 규제 완화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현재 국내에서는 생명윤리법에 의거해 의사가 아니면 게놈 분석을 할 수 없다. 하지만 게놈 정보는 의료 정보인 동시에 개인 정보이고, 과학 기술 정보이며, 바이오 정보이다. 첨단 IT 정보이자 얼굴 인식 정보이기도 하다.
“게놈 정보의 주인은 누구도 아닌 본인인데, 마음대로 분석할 수 없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지요.”
돌연변이를 찾아라
병의 원인을 찾을 수 없고, 찾았다 하더라도 치료 방법이 없었던 과거와 달리, 이제 우리는 사람 몸 안의 게놈을 분석하면서 병을 해결하는 시대를 맞이했다.
“제가 하는 일은 질병이나 암 환자에게서 채취한 DNA 샘플로 게놈 데이터를 분석해 그 질병과 연관된 돌연변이를 찾는 겁니다. 이렇게 찾아낸 돌연변이를 통해 질병 발생의 기작을 이해할 수 있고, 개개인의 질병 발생 위험도를 평가할 수 있으며, 조기에 진단할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각 환자별 맞춤 치료가 가능해지지요.”
생명과학부 이세민 교수는 돌연변이를 찾으려면 되도록 많은 이들의 게놈 데이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해야 다양한 돌연변이들이 집단 내에서 어떤 식으로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대규모 분석이 선행돼야 좀 더 정확하게 돌연변이와 질병과의 연관성을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이다.
“쉽게 설명하면 병에 걸리지 않은 분들의 게놈에서는 보이지 않는 돌연변이들이 환자 그룹에서는 자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질병 유발 돌연변이’를 발견하게 되는데, 적은 인원을 분석해서는 발견하기 쉽지 않습니다.”
더불어 이세민 교수는 앞으로 진행될 ‘울산 만 명 게놈 프로젝트’를 통해 한국인의 특징을 알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한국은 거대한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지역별 편차가 그리 크지는 않을 거라 생각해요. 울산 시민 만 명 이상의 게놈을 분석한다면, 한국인을 대표하는 게놈 데이터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습니다. 한국인에 특화된 게놈 연구의 첫 단추를 꿰는 셈이지요.”
사람의 몸 안에는 2만 개 이상의 유전자가 있고, 이들은 A, C, G, T처럼 암호화되어 있다. 이들이 어떤 식으로 배열되어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바로 게놈 분석. 그렇다면 게놈을 분석하는 데는 어떤 기술과 장비가 필요할까? 현미경만 들여다본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다.
“분석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최근 가장 많이 쓰이는 건 차세대염기서열분석법(Next Generation Sequencing, NGS)인데, 이 기술 덕분에 게놈 분석 비용이 많이 저렴해졌어요.”
클리노믹스 김병철 대표는 NGS 기술을 활용한 게놈 분석기기가 최근 가장 널리 이용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게놈 분석 장비 및 시약 시장은 2015년 3.6조 원에 이를 정도로 급격히 발전하고 있다. 현재 이 시장은 미국이 가장 큰 우위를 점하고 있다. 일루미나, 라이프테크놀로지 같은 유명 기업들 역시 대표적인 미국의 게놈 분석기기 업체다. 우리나라는 이에 비해 활발하지 않은 상황.
“우리나라는 현재 게놈 분석기기 기술이 거의 없어요. 하지만 이미 늦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돼요. 예를 들어 반도체를 보세요. 일본이 앞서 있다고 해서 우리가 뛰어들지 않았다면, 삼성이 지금 같은 기술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원천기술은 파급효과가 큰 데다 그 효과가 굉장히 오래 가요.”
김병철 대표는 영원한 것은 없다며 현재 대표적인 게놈 분석기기 업체인 일루미나, 라이프테크놀로지 역시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우리에게도 아직은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것.
“게놈 분석 시장에서 현재 상용화된 것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아요. 미개척 분야가 그만큼 많다는 거죠. 특히 개인 유전체 검사, 암 진단, 출생 전 아이의 선천이상을 진단하는 임산부 산전 진단 등은 미래가 밝고 성장 가능성이 큰 시장입니다.”
개인 맞춤형 치료 시대가 온다
탁월한 게놈 분석 기술과 이를 가능케 하는 장비가 있다면, 암과 난치병 등 실제 치료에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올해 본격적으로 시동을 거는 ‘울산 만 명 게놈 프로젝트’에서도 이런 치료와 연구가 진행될 예정이다.
“이번 프로젝트는 한국인 게놈 연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질 거예요. 그분들의 개인 유전 정보를 바탕으로 질병을 포함해 유전적으로 나타나는 형태적・생리적 성질을 다양하게 찾아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게놈 분석은 혈액 채취를 통해 이뤄지는데, 이렇게 수집한 혈액은 일단 국가공인기관인 인체유래물은행으로 갑니다. 이곳에 보관하고 있다가 정밀한 분석을 위해 UNIST 게놈연구소로 전달될 예정이고요.”
울산대학교병원 박능화 교수는 최근 게놈 분석 기술이 발전하면서 의학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과거에는 집단 중심으로 분석이 이뤄진 반면, 최근에는 개개인에게 맞는 맞춤 분석과 맞춤 치료가 가능한 시대가 됐다는 것.
“개개인의 암 유전체 분석을 통해 개인 맞춤형 항암제 표적 치료가 가능한 시대가 됐어요. 별도의 조직검사를 하지 않아도 혈액 내에 있는 암세포나 암 유전자를 이용해서 암을 진단하거나 항암제를 선택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게놈 분석이 발전된 미래에는 각 개인별 질병 발생 위험도를 예측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질병의 진단과 치료 및 예방을 위한 다양한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
“미래에는 개인별 유전적 특성에 따라 질병의 예방과 진단, 치료가 이뤄지는 맞춤의료 시대가 올 거예요. 건강 100세 시대가 머지않았습니다.”
작년 11월 선포식으로 시작된 ‘울산 만 명 게놈 프로젝트’는 국내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큰 프로젝트다. 그만큼 많은 고민이 필요했을 터. 그들이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던 원동력은 어디에 있을까?
“이번 프로젝트는 게놈을 기반으로 한 예측 진단 예방및 치료에 핵심이 되는 바이오메디컬 산업의 핵심입니다. 울산은 이미 제조업 기반이 갖춰진 도시입니다. 게놈 분석에 관한 제품이 나온다고 할 때 설비를 새로 갖추지 않아도 되는 장점이 있죠. 또 인근에 원자력발전소가 있어 바이오 빅데이터를 생성하고 분석하는 데 필요한 전력 공급도 안정적일 겁니다.”
울산시청 산업진흥과 김석겸 과장은 ‘울산이 게놈 산업의 최적지’라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이 프로젝트가 잘 진행된다면 국민 건강 증진은 물론 경제의 활성화, 먹거리 산업 창출 등의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울산시의 ‘게놈 기반 바이오메디컬 산업 육성사업’은 올해 2월 대통령 직속 지역발전위원회 주관 공모사업인 지역행복생활권 선도 사업에 선정됐다. 올해 6월부터 참여 홍보를 실시하며, 7월부터는 혈액 채취를 비롯한 본격적인 프로젝트 진행에 돌입한다. 금년부터 내후년에 이르기까지 3년 동안 울산 시민 1000명의 게놈을 분석할 계획이며, 이어서 1만 명으로 확대해 전개할 예정이다. 예정대로 국가 게놈 기술 센터가 울산에 세워진다면 더 나아가 ‘전 국민 게놈 사업’이라는 거대한 목표도 갖고 있다.
“많은 울산 주민들의 문의를 받았습니다. 특히 암이나 난치병을 앓고 있는 분과 가족들의 관심이 뜨거웠어요.”
김석겸 과장은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신뢰 회복’이라고 했다. 황우석 박사 사례가 있어서인지 우려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 개인 정보는 철저히 보관되어 악용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게놈 분석이 우리들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긍정적인 효과를 널리 알린다는 계획이다.
게놈은 어느새 ‘인류의 한계를 뛰어넘을 황금열쇠’로 자리 잡았다. 게놈을 분석해 우리는 어디까지 알아낼 수 있을까. 무병장수라는 전 인류의 공통된 꿈은 실현될까. 답은 게놈 안에 담겨 있고, 우리는 황금열쇠를 찾으려는 모험가들이다. 원하든 원치 않든 모험은 이미 시작됐다. 인류의 비밀이 담긴 상자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있을까. 판도라의 상자일까, 행운의 상자일까. 가만히 꿈만 꾸어서는 답을 얻을 수 없다. 답은 오직 두 발로 뛰는 모험가들의 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