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세종대 신소재공학과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이현욱 에너지 및 화학공학부 교수가 그린 미래는 평범했다. 많은 청년들이 그런 것처럼 대학을 졸업한 뒤 회사에 취직해 경제적 독립을 얻는 것. 그런 그가 어느덧 시간이 흘러 이차전지 분야를 연구하며 TEM 분야의 전문가로 손꼽히고 있고, 2019년 HCR로 선정되었다. 최근 진행된 옥스퍼드 대학과의 공동연구 등 활발한 연구로 소신 있게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이현욱 교수를 만나보았다.
이현욱 교수는 학부 1년을 마치고 일찌감치 군대도 다녀왔다. 그런데 2학년에 복학해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여름부터 아르바이트한 실험실에서 인턴 생활을 시작하면서 변화가 생겼다. 실험하고 틈틈이 논문도 보면서 문득 대학원 생활도 해 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공에 흥미가 커지면서 성적도 잘 나왔다. 어느 시점부터 이 교수는 본격적으로 대학원 입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2007년 꿈을 안고 KAIST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는 그때 꽤 씁쓸한 경험을 했다. KAIST는 일단 입학한 뒤 실험실을 정하는 시스템이었고, 이 교수는 반도체나 금속을 연구하는 몇 군데 실험실에 지원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결국 차선으로 김도경 교수의 세라믹(무기재료) 실험실에 들어갔다.
한 한기가 끝난 여름, 지도교수인 김 교수가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떠났고, 낯선 곳에서 좀 적응이 된 이 교수는 아쉬움이 컸다. 그런데 누가 알았을까? 김 교수가 미국에서 연구자로서 그의 미래를 결정할 일을 도모하고 있었을 줄을.
생각지도 않은 배터리 연구로 피어난 열정
김 교수는 안식년을 맞아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에서 1년 동안 머물렀는데 어느 날 인근 스탠퍼드대에서 배터리를 전공하는 이추이 교수를 만났다. 젊은 이추이 교수는 열정이 가득했지만 아직 경험이나 인맥이 적어 연구에 애를 먹고 있었다. 특히 배터리 소재를 만들어줄 공동연구자가 꼭 필요했다. 합성에는 자신이 있었던 김 교수는 이추이 교수와 의기투합했다.
김 교수팀은 리튬배터리의 양극 소재인 리튬망간산화물 합성 연구를 시작했고 이현욱 교수도 연구팀에 차출됐다. 그로서는 생각지도 않은 일이었다.
2007년 아이폰이 출시되면서 스마트폰의 시대가 시작됐고 이를 가능하게 한 요소 가운데 하나인 리튬배터리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심지어 배터리를 ‘21세기의 반도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20세기 후반을 대표한 반도체를 연구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이 교수가 뜻밖에 21세기의 아이콘을 연구하게 된 것이다.
그는 금방 배터리 전극 합성 연구에 매료됐고 2009년 석사학위를 받은 뒤 같은 실험실에서 박사과정에 들어가 연구를 이어나갔다. 제자의 ‘타고난’ 손재주를 눈여겨봐 온 김 교수는 2010년 어느 날 그를 불러 TEM(투과전자현미경)으로 배터리 전극의 구조를 분석하는 과제를 맡겼다. 배터리의 성능을 높이기 위해서는 충전과 방전이 일어날 때 전극에서 일어나는 구조적 변화를 실시간으로 관찰하는 게 결정적인 도움이 될 수 있기때문에 당시 몇몇 그룹이 TEM 연구에 뛰어들었다. 원자 수준의 구조를 파악하려면 나노미터의 해상력이 필요한데, 파장이 긴 빛(광자)을 이용하는 광학현미경으로는 어림도 없다. 파장이 아주 짧은 전자빔을 쓰는 전자현미경이 필요한 이유다.
이 교수는 자신에게 중책을 맡긴 김 교수에게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졸업할 때까지 성공적으로 실험을 마무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2년 동안 TEM과 씨름하면서 많은 노하우를 체득했고, 졸업 뒤 스탠퍼드대 이추이 교수 실험실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있을 때 마침내 그의 열정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스탠퍼드대, 새로운 도약의 시기
“스탠퍼드대에서 머물던 3년 반이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습니다. 연구도 잘 풀리고 모든 게 좋았죠.”
2012년 6월 이추이 교수의 실험실에 도착했을 때 그는 제2의 도약을 위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5년 넘게 김 교수의 실험실에서 배터리 전극의 합성에서 분석까지 섭렵하면서 이론은 물론 정교한 실험기법을 손에 새겼다. 특히 TEM은 시료의 준비에서 측정, 분석까지 실험자에게 인내와 세심함을 요구하는 까다로운 장비다. TEM 연구를 맡을 사람이 필요했던 이추이 교수가 그를 두 팔 벌려 환영한 이유다.
많은 시행착오 끝에 TEM을 능수능란하게 다루게 된 이 교수는 마침내 탁월한 연구결과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저명한 학술지 <네이처 나노테크놀로지(Nature Nanotechnology)> 2015년 11월호에 실린 논문도 그 가운데 하나다.
리튬배터리의 수요가 많아질수록 리튬의 수급이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대안으로 나트륨배터리가 거론된다. 그러나 문제는 마땅한 음극 소재가 없다는 것.
이추이 교수팀은 인의 한 동소체인 흑린(phosphorene)과 그래핀으로 만든 하이브리드 소재로 음극을 만들었고 이 교수는 실시간 TEM으로 충전과 방전 과정에서 일어나는 화학반응과 이에 따른 구조적 변화를 명쾌하게 규명했다.
“실시간 TEM 기법은 스냅샷 사진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얻은 데이터를 분석하면 충전과 방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구조의 변화를 단계별로 재구성할 수 있지요.”
국내외 10여 개 팀과 공동연구 진행
보람 있는 박사후연구원 생활을 마치고 2016년 UNIST에 부임한 이현욱 교수는 불과 4년 만에 박사후연구원 1명, 대학원생 12명으로 이뤄진 꽤 큰 실험실을 운영하게 됐다. 그만큼 배터리, 특히 이를 분석하는 TEM 연구에 대한 수요가 많다는 뜻이다.
배터리가 모바일 기기를 넘어 자동차에 본격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하면서 좀 더 효율성이 높고 안전한 배터리를 개발하려는 연구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그러나 연구 속도를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실시간 TEM 분석 전문가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런 이유로 이 교수팀의 경우 이미 10곳이 넘는 실험실과 공동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한 곳인 영국 옥스퍼드대 마우로 파스타 교수팀과의 공동연구 결과가 최근 저명한 학술지 <네이처 머티리얼즈(Nature Materials)>에 실렸다. 이 교수팀은 실시간 TEM 분석으로 리튬배터리의 에너지 밀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양극 소재인 이플루오르화철(FeF2) 나노결정의 변환 메커니즘을 규명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기존 리튬배터리는 전극 구조물의 틈에 리튬이온이 끼어 들어가고 빠져나오는 물리적인 현상을 이용하기 때문에 에너지 밀도를 높이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결국 화학반응으로 가야 하는데 이를 안정하게 하는 방법을 찾는 게 큰 과제이고, 따라서 TEM이 더욱 긴요하죠.”
최근에는 새로운 TEM 분석 기법을 개발해 주목받았다. 현재 널리 쓰이고 있는 리튬배터리는 액체 전해질 형태이기 때문에 화재나 폭발의 위험성이 내재해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고체전지(all-solid-state battery)가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관건은 물성이 좋은 고체 전해질을 만드는 것인데 만만치 않은 일이다.’
이 교수팀은 정윤석 한양대 에너지공학과 교수팀과 함께 황(S)화합물 고체 전해질을 개발하면서 그 구조를 원자 단위에서 분석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게 기존 TEM 기법으로는 불가능했다. 황화합물은 결합력이 약해 전자빔에 쉽게 깨지기 때문에 온전한 데이터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교수팀은 시료를 영하 170도로 급냉시킨 뒤 전자빔을 쏘면 이런 손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실험했고 멋지게 성공했다. 이번 연구결과는 나노분야의 권위지 <나노 레터스(Nano Letters)>’에 5월 5일자로 공개됐다.
좋은 연구란 다양한 시각과 능력 갖춰 협력하는 것
“TEM은 대당 가격이 수십억 원이나 하는 고가 장비입니다. 다행히 UNIST에는 TEM이 7대나 있어 여러 연구를 동시에 진행할 수 있죠. 저로서는 큰 행운입니다. 앞으로도 새로운 기법을 많이 개발해 독보적인 TEM 기술을 보유하고 싶습니다.”
UNIST에는 TEM을 비롯한 좋은 장비도 많지만, 무엇보다 배터리를 연구하는 교수들이 많다는 게 큰 힘이 된단다. 이들의 역량을 합치면 미국의 거대한 국립 연구소에도 전혀 밀리지 않는다고 이 교수는 힘주어 말한다. 또한 우리나라는 대기업이 배터리 산업을 이끌고 있는 것도 유리한 점이다.
“배터리 분야는 지금의 한중일 3강 체제가 당분간 지속될 것입니다. 일본은 기술력이 강점이고 중국은 자본이 강하지만 우린 둘 다 갖추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경쟁력이 있습니다. 저희의 TEM 분석 기술이 우리나라 배터리 산업에 큰 보탬이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2016년 부임했을 때 이 교수는 적어도 3년은 직접 TEM을 다뤄야 할 것이라고 각오했다. 그런데 학생들이 기대 이상으로 빨리 기술을 습득해 이제는 많은 일에서 ‘손을 떼고’ 맡겨도 안심할 수 있게 됐다. 앞으로는 TEM 운영을 최대한 자동화하고 데이터 이미지 분석에 AI(인공지능)를 접목해 도움을 받는 연구도 진행할 예정이다.
배터리 연구 분야에 적합한 소질이 있느냐는 물음에 이 교수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날 연구는 어떤 분야에서든지 하나만 잘 해서는 제대로 진행하기 어렵고 다양한 시각과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협력해야만 좋은 결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 개성과 소질이 다릅니다. 따라서 나에게 맞는 일을 즐겁게 하면서 연구에 기여 하는 길이 얼마든지 있지요.”
글_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서울대 화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지내며 <강석기의 과학카페>, <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를 저술했으며, 옮긴 책으로는 <반물질>, <가슴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