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계 학사교육은 여전히 50년 전에 머물러 있습니다. 과거의 교과서로, 과거의 지식을 반복적으로 답습해서는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혁신을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이용훈 UNIST 총장의 지난 2년은 대한민국 과학기술 교육의 틀을 새롭게 짜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는 ‘격투기형’ 학사교육을 도입해 최신 분야에 강점을 가진 실전형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 국가 과학기술의 미래를 준비하는 과기원의 역할이라고 강조해왔다.
‘격투기형’ 교육은 실전에 필요한 기본기만 익힌 후, 링에 올라 직접 문제를 겪으며 배우는 교육방식을 말한다. 단계별로 전 분야의 지식을 두루 익히는 ‘쿵푸형’ 교육과 대비되는 것으로, 신속하게 문제해결능력을 기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용훈 총장은 “팬데믹, 기후변화 등 인류를 위협하는 난제를 해결할 열쇠는 결국 과학기술에 있다”며 “현장에서 바로 문제를 마주하고 해결해나갈 수 있는 과학기술 인재의 공급이 더 빠르게 이뤄져야 하는 이유”라고 설명한다.
이용훈 총장은 지난 2019년 11월 UNIST에 부임하면서부터 학사교육 혁신에 나섰다. 핵심은 최신 분야를 신속하게 접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실전 경험을 제공하는 두 가지에 있었다. 이 총장은 이를 통해 ‘과학기술계 BTS’를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먼저 전통산업 시대에 맞춰 설계된 기초교과목을 개편하고, 최신 분야에 대한 단기집중강좌를 개설하는 작업이 이뤄졌다. 인공지능·디지털 시대에 맞는 과목을 개설해 학생들의 선택의 폭을 넓힌 것이다. 2021년 2학기부터 시작된 ‘원 데이 렉쳐 시리즈’에서는 블록체인, 암 치료 등 학생들의 관심도가 높은 최신 분야 강좌가 제공된다.
최신 과학기술 분야의 기초를 익힌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관련 연구를 심화할 수 있는 실전 경험의 기회도 제공된다. 인공지능 스터디그룹을 결성해 지원하는 ‘인공지능(AI) 챌린저스 프로그램(AICP)’에는 총 23개팀, 97명의 학생들이 참가하고 있다. 이들은 인공지능 각 분야의 연구로 논문을 작성하거나, 글로벌 챌린지에 도전한다. 지역 산업 현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실전문제 연구팀’ 사업에는 170명의 학생이 참가해 26개 지역 기업의 고민을 풀기 위해 도전하고 있다.
이 총장은 “연구와 산업 현장의 문제를 직접 마주한 학생들은 어떤 공부가 더 필요한지 스스로 느낄 수 있다”며 “자기주도적으로 문제를 발굴하고 해결하는 경험을 통해 우리 사회의 미래를 이끌 연구자, 창업자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학부 졸업을 앞둔 3, 4학년 학생들에게는 기업 현장의 업무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장기 인턴십 프로그램(Coop)이 제공되고 있다. 올해는 네이버, LG전자 등 8개 기업에 18명이 파견됐다. 이들은 기업 파견 전에 관련 연구실에서 사전 교육을 받고, 6개월 이상 근무하며 경험을 쌓는다. 중소기업, 스타트업에서 2개월 간 근무하는 산학연계 프로그램(CUop)에도 매년 30여명의 학생들이 참여한다.
창업에 나설 학생들을 위한 교육, 지원도 풍성하다. ‘유니콘 프로젝트’를 통해 예비 창업자에 대한 체계적 교육을 진행하고 있고, ‘실험실 창업 혁신단 사업(I-Corps)’을 통한 연구 기반의 기술창업 지원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이는 학생들이 탄탄한 기술을 바탕으로 창업에 나설 수 있는 발판이 되고 있다.
이용훈 총장은 “연구와 창업 모두에서 실전 문제해결력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목표”라며 “최초에 과감하게 도전할 수 있는 과학기술인재들이 탄생할 수 있는 환경 마련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전했다.
첨단 기술 분야 인재 육성에 앞장서며 예비 창업자를 키워나가고 있는 UNIST의 노력에 지역사회도 적극 호응하고 있다. 울산 지역에서 IT 소재분야 강소기업을 일궈온 이준호 덕산그룹 회장은 지난 11월 4일 지역 산업 혁신의 요람이 되어달라며 UNIST 발전기금으로 사재 300억 원을 쾌척했다.
이준호 회장의 기부금은 UNIST 내 ‘챌린지 융합관’을 건립하는데 사용될 예정이다. 챌린지 융합관은 학생들이 실전형 교육을 통해 첨단 과학기술을 직접 배우고 체험하며 마음껏 연구와 창업의 꿈을 꿀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될 예정이다.
<교육혁신 관련 이용훈 총장과의 일문일답>
Q1. 이공계 교육 혁신에 주력해오셨는데, 그 배경은?
우리나라 연구중심대학은 대학원 중심의 인재육성 체계를 갖고 있다. 학사과정 교육보다는 대학원 진학 이후의 연구과제 중심의 인재육성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1971년 개원한 KAIST가 정립한 방식이다. 문제는 과학기술 발전의 속도가 점차 빨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학원 과정에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는 것은 늦었다. 이제 학사과정에서부터 발 빠르게 변화를 수용해야 하는 것이다.
이공계 교육은 더 이상 과거에 머물러선 안 된다.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혁신의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과감한 변화가 필요하다. 학생들이 좀 더 빠르게 새로운 지식을 접하고,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필요한 분야에 흥미를 갖고 도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이공계 학사교육 혁신에 주력해왔다.
Q2. 수직형 교육, 격투기형 학습을 강조해왔다. 이는 어떤 종류의 학습인가?
지금까지 우리 교육은 수평형 강의, 쿵푸형 학습의 형태였다. 기초를 탄탄히 하고, 심화학습을 거친 뒤, 응용으로 넘어가는 단계적 학습의 방식이었다는 의미다. 품새와 기본자세를 철저히 익히고 난 뒤에야 겨루기를 할 수 있는 쿵푸의 방식인 것이다. 한 분야를 익히기 위해서는 그만큼 오랜 시간과 인내가 필요했다.
반면 격투기형 교육은 기본기만 익히고 바로 실전에 오르는 방식을 말한다. 기본스텝과 잽만 익히고, 바로 실전에 나서며 스파링을 통해 배우는 방식이란 의미다. 어떤 분야에서 연구에 나선다고 하면, 그 분야 전반의 지식을 모두 익히기는 것이 아닌, 기초부터 응용에 걸친 지식 중 핵심만을 배운 후 직접 문제에 도전하며 필요한 부분을 채워나가는 것이다. 기초, 심화, 응용 중 핵심만을 꿰뚫는 수직형 교육은 새로운 분야를 좀 더 빠르게 익히고, 흥미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이다.
Q3. 육성하고자 하는 이공계 미래 인재상이 있다면?
알파고의 아버지, 데미스 하사비스 박사를 좋은 모델로 꼽는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천재 게임개발자였고, 이세돌과 세기의 대결을 펼친 구글 딥마인드를 창립한 인물이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그의 업적이 아닌 새로운 문제 해결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그의 학습 스타일에 있다.
게임개발자 시절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던 그는 인공지능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인지과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스스로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를 찾았고, 이를 위해 즉시 필요한 공부를 찾아 뛰어들었다. 주체적으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혁신가. UNIST가 키워내고 싶은 인재상이다.
Q4. 과학기술계 BTS 탄생을 위해 앞으로 집중할 분야는?
BTS의 성공비결로 두 가지를 꼽는다. 첫째는 자기주도적 마인드를 키운 것이다. 자신들이 성장하며 느낀 고민과 깨달음을 바탕으로 직접 곡 작업에 참여했던 과정이 팬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두 번째는 최고의 육성 시스템을 갖췄던 것이다.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 각 분야의 대가로부터 수년에 걸친 지도를 받으며 인내했던 과정이 있었다.
UNIST가 미래사회를 선도할 과학기술계 BTS 육성을 위해 노력할 부분도 이와 같다. 학생들이 스스로 관심을 갖고 문제를 설정할 수 있도록 돕고, 그 과정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다. 학생들이 스스로 관심 갖는 주제에 대해서 연구동아리를 결성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매년 100개의 동아리를 설립, 운영하는 게 목표다. 이들 동아리가 맘껏 연구하고, 창업할 수 있는 장소로서 ‘챌린지 융합관’을 조성하는 작업에도 박차를 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