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의 교수는 UNIST에서 생체모방공학을 연구하고 있다. 그가 이끄는 연구실은 대체로 자유롭다. 연구 특성상 연구자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정 교수는 학생들의 멘토이자 인생 선배로서 연구팀을 다독이며 이끈다. 그의 스승, 故 서갑양 교수에게 배운 연구에 대한 자세를 실천하는 중이다.
“형이라고 불러.”
2004년 3월의 어느 날, 대학원 입학 후 처음 만난 지도교수가 신입생들에게 건넨 말이다. 필자는 물론 다른 학생들도 무척 당황했다. 하지만 33살의 젊은 나이에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교수로 부임한 故 서갑양 교수에게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1972년생인 그와 필자의 나이 차이는 불과 7살뿐이었으니 사회에서 만났다면 충분히 형이 될 수 있었다.
故 서갑양 교수는 석・박사 과정 동안 수많은 국제 논문을 출판하고, ‘MIT에서 선정한 젊은 과학자 100인’에 선정됐던 인물이다. 언론에도 그의 이름이 알려져 학생들에겐 함부로 올려다보기 어려운 큰 과학자로 인식됐다. 그런데 막상 대학원에서 겪어본 그는 학생들과 격의 없이 지내는 인간적으로 따뜻한 사람이었다. 힘든 일은 도와주고 고민도 진지하게 들었다. 그 덕분에 필자도 형식에 얽매지 않고 자유롭게 의견을 내며 적극적으로 연구할 수 있었다. 어려운 부분에 닥칠 때면 언제나 그를 찾아가 상의하고 돌파할 수 있었다.
외곬으로 이룬 꾸준하고 성실한 연구
많은 이들이 창의적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생각, 톡톡 튀는 인재가 중시되는 시대다. 그런 인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하지만 창의성은 한 순간 반짝하고 튀어나오는 게 아니라 한 분야를 꾸준히 파고드는 끈기와 성실함에서 나온다.
필자가 대학원생일 당시 ‘지도교수보다 논문을 더 많이 쓰겠다’는 목표를 세운 적이 있다. 밤낮 없이 실험하고 결과를 정리해 논문 초고를 작성했다. 故 서 교수는 필자 초고를 받으면 늘 일주일 내로 논문을 완성해 국제저널에 투고했다.
대학원 과정 내내 이런 과정을 반복했던 필자에게는 연구와 영어 논문 작성이 자연스런 일상이 됐다. 그러다 보니 대학원을 졸업할 즈음에는 국제 저널에 발표한 논문이 20편에 가까워졌다.
철없던 당시에는 지도교수가 제자의 논문을 검토하고 투고하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교수가 되고 보니 강의에 국내외 출장까지 소화하느라 일정이 여간 빠듯한 게 아니다. 출장 시 비행기나 호텔에서 논문 작업에 집중하려 해도 마음처럼 쉽게 되지 않았다. 대학원생일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지도교수의 성실함과 꾸준함이 다시금 떠오를 때가 적지 않다.
故 서갑양 교수의 사무실은 항상 늦은 밤까지, 때로는 새벽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 해외 출장 중에도 비행기나 호텔 안에서 항상 논문 작업을 하곤 했다. 그가 생체모사공학과 마이크로․나노공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힘의 원천은 학문을 대하는 꾸준함과 성실함에 있었다.
같이하는 연구, 함께 이룬 과학
최근 중요하게 부각되는 융합 연구를 하려면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힘을 모아야 한다. 다른 전공을 가진 연구자들과 원활하게 소통하고 성공적으로 연구하려면 배려하는 자세가 필수적이다. 필자는 대학원생 때 생체모사 접착 기술을 연구하며 이런 자세를 배웠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몇몇 대학들이 같은 주제로 경쟁할 만큼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때 故 서갑양 교수가 화학공학을 전공한 대학원생을 소개해줬다. 전공 분야는 서로 달랐지만 서로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연구를 진행하다 보니 진척이 있었다. 그 결과 스탠포드대나 UC버클리 등 세계적인 연구팀보다 한 발 앞서 좋은 연구 결과를 얻었고, 삼성휴먼테크논문대회에서 금상도 받았다.
이 경험으로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함께 연구하는 방법을 배우게 됐다. 그는 필자에게 ‘열린 자세’라는 소중한 덕목도 알려준 것이다.
거북이는 의외로 빠르다
故 서갑양 교수가 톡톡 튀는 매력을 가졌던 인물은 아니다. 필자의 기억 속 그는 1년 365일 연구를 최우선 순위로 뒀던 꾸준함과 성실함 그 자체였다. 항상 웃는 얼굴로 상대방을 배려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 성실함과 꾸준함, 배려를 기반으로 그는 생체모사공학과
나노공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과학기술원으로 전환한 UNIST에서는 우수한 학생들이 더 많이 몰릴 예정이다. 그 인재들이 각자 창의적이거나 개성 넘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필자는 꾸준함과 성실함을 무기로 삼은 인재가 되길 바란다. 창의적인 결과, 세계적인 연구 성과도 결국은 한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파고드는 열정, 꾸준함, 그리고 성실함에서 비롯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글_ 정훈의 기계 및 원자력공학부 교수
* 정훈의 교수는 자연을 모방하는 기계공학자다. 그의 전공 분야는 ‘생체모방공학’. 주로 자연 속 생물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공학적으로 구현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게코 도마뱀의 발바닥 구조를 모방해 어디에나 잘 달라붙는 표면이나 물에 젖지 않는 연꽃잎 표면을 모방한 나노구조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