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2인조 밴드 사이먼&가펑클의 ‘아트 가펑클’은 컬럼비아대에서 수학을 전공했다. 최근 화성에서 소금물 흔적을 발견한 과학자 ‘루젠드라 오지하’는 데스메탈을 하던 뮤지션이었다. 한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뇌섹남으로 인정받은 ‘이장원’ 역시 밴드 페퍼톤스의 멤버이자 KAIST 전산학과 출신 과학도다. 연주하는 과학자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오히려 연주가 과학도를 더 빛나게 한다.
울산과학기술원 출범식과 초대 총장 취임식이 있던 날, UNISTRA 단원들은 이른 시간부터 본관 2층 대강당에 모였다. 오늘 행사를 멋지게 장식할 음악을 선사하기 위해서다. 무대도 세워지기 전 객석 앞에자리 잡은 단원들은 이종은 단장(기초과정부 교수)의 몸짓 하나, 손짓 하나에 집중했다. UNIST 역사에 길이 남을 날을 축하하기 위해 찾은 손님들을 기쁘게 할 완벽한 선율은 UNISTRA의 손에 달렸다.
“오늘 연주는 평소 UNISTRA가 하는 연주와는 차이가 있어요. 미리 오신 분들이 본 행사를 기다리는 동안 지루하지 않도록 분위기를 돋우는 곡도 있거든요. 식전에 가볍고 편안한 분위기를 위한 배경음악을, 본식에서는 웅장하고 진중한 곡을 준비했습니다.”
바쁜 와중에도 모든 악기의 음색을 꼼꼼히 매만지던 이종은 단장이 말했다. 그녀는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일원이자, 전체를 진두지휘하는 지휘자이기도 하다.
삼삼오오 모여든 사람들이 객석을 가득 채우자 단원들은 각자의 악기를 들어 올렸다. 이윽고 UNISTRA가 연주하는 음악이 대강당 전체에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좋은 음악이 흐르자 실내 분위기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개원식과 취임식을 기다리며 분주했던 청중들도 하나둘오케스트라의 연주에 귀를 기울였다. UNISTAR의 연주 덕분에 UNIST의 시작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모두 이른 아침의 여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UNISTRA의 새로운 시작
연주가 끝날 때마다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지휘자가 없는 상황에서도 UNISTRA의 연주는 매끄럽게 이어져 행사가 물 흐르듯 진행되는 데 도움을 줬다. 마지막 곡으로 선정된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지금 이 순간’은 성악가 김승희의 목소리가 더해져 완벽한 하모니를 이뤘다. UNIST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순간, UNIST 대표 오케스트라로 출범한 UNISTRA의 첫 공식 무대가 멋지게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단원들 모두 학부생으로 구성된 UNISTRA의 완벽한 공연 뒤에는 2년 반이라는 인고의 시간이 있다. 2012년 2학기 자발적 소모임으로 출발한 오케스트라는 연습할 공간이 마땅치 않아 학생회관의 동아리방을 전전했다. 동아리방이 비어있는 시간을 찾아 연습하거나 이 단장이 강의하는 바이올린 스튜디오에 모여 실력을 키워온 것이다.
“2년 전 당시 부총장이었던 정무영 총장을 만나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때 정 총장은 단 한 마디로 답했어요. ‘보여주세요’라고. 우리 스스로 실력을 증명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해야 했어요.”
이 단장은 정 총장의 대답을 들은 뒤 단원들과 더욱 단단하게 의기투합했다. 방학 때마다 혹독한 합숙훈련에 돌입했고, 틈날 때마다 연습하며 실력을 쌓았다. 또 갈고 닦은 실력을 바탕으로 졸업식과 입학식 등 UNIST의 각종 공식 행사의 연주도 도맡았다.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어 올해 9월 UNIST의 공식 오케스트라로 출범하게 됐다.
새 퍼커셔니스트 영입으로 탄탄해진 UNISTRA
학교 공식 오케스트라가 되면서 가장 좋아진 점은 악기 구매다. 학교에서 예산을 배정받아 구매한 악기는 한층 풍성한 연주를 가능케 했다. 에너지 및 화학공학부 전성훈 학생 역시 UNISTRA가 공식 오케스트라로 출범하면서 합류하게 된 멤버다.
성훈 학생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울산시향의 팀파니스트에게 배운 숨은 실력자다. 지금까지는 악기가 없어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참여할 수 없었지만 이제 가능해졌다. 과거 울산 타악기 앙상블 단원으로도 활동했던 성훈 학생이 함께하게 된 건 ‘신의 한 수’였다. 그의 퍼커션이 열악한 공연 상황에서도 단원 모두에게 신호를 주어야만 하는 이 단장의 부담을 덜어주기 때문이다. 이종은 단장이 퍼커션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퍼커션이 리듬을 세워주지 못하고 넘어지면 함께 연주하는 이들도 모두 쓰러져요. 그만큼 누구보다 박자 감각이 탁월해야 합니다. <음악과 창의성>이라는 수업에서 현악기를 배운 성훈 학생은 연주자들의 신호를 놓치지 않고 받아들일 뿐 아니라 다른 악기들이 흔들리지 않도록 굳건히 버텨줍니다. 정말 든든한 친구예요.”
아마추어 음악가들이 만들어내는 완벽한 선율
전문 음악인으로서 프로 음악가들을 만나고 가르치던 이종은 단장에게 비전공자들을 가르치고 단원들을 이끄는 일이 버겁지는 않을까.
“처음에는 굉장히 힘들었어요. 정확히 2년 반 전에는 오늘 연주한 프로그램은 엄두조차 내지 못했죠. 하지만 실력은 연습으로 채울 수 있어요. 사실 음악을 전공으로 삼은 학생들은 연습량에 치여 음악에 대한 애정을 잃거나 억지로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UNIST 학생들은 오로지 음악에 대한 사랑만으로 연습을 이어나가요. 부족한 기술 때문에 연주가 잠깐 정체되는 경우는 있어도 악기를 놓는 일은 없어요.”
이종은 단장에게 아마추어 음악가들이 낯설지만은 않다. 어릴 때부터 과학도인 아버지를 따라 POSTECH 오케스트라 연주를 보러 다녔고, 예일대 재학 시절에도 비전공자들의 오케스트라를 봐왔다. UNIST에 오기 전에는 스토니브룩의 예비학교에서 대학 진학을 앞둔 비전공자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평생 음악을 배우고 가르친 제 입장에서 보면 부족한 점만 보이죠. 하지만 전공자와 비전공자의 차이에만 집중하면 부족한 점을 채울 수 없어요. 저는 그저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제가 알려줄 수 있는 걸 모두 가르쳤어요. 그리고 묵묵히 1년 반을 참으니까 어느 날 아이들이 연주를 해내더라고요.”
과학도, 음악으로 연구의 길을 닦다
“클래식은 공부에 집중하려고 들었어요. 공부에 방해되지 않으면서도 지루함을 쫓는 데 클래식이 좋거든요. 그렇게 귀로만 듣던 음악을 제 손으로 직접 연주하니 묘한 성취감을 느끼게 되더라고요.”
디자인 및 인간공학부 최다솜 학생이 바쁜 학부 생활 속에서도 오케스트라 활동을 게을리 할 수 없는 이유다. 다솜 학생의 의견에 이 단장 역시 공감한다.
“UNISTRA의 최종 목표는 음악을 잘하는 게 아니에요. 음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훌륭한 과학도를 키워내는 것이죠. 사람들은 뛰어난 예술작품들을 접하고 이해하면서 이전까지 생각지 못했던 아이디어나 영감을 얻게 되잖아요. 음악이 UNISTRA 단원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거죠.”
UNISTRA의 음악은 클래식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퀸의 ‘We Are The Champion’을 연주하기도 하고, 때론 마이클 잭슨의 곡을 선보이기도 한다. 연주하는 곡에 장르의 구분이 없듯 과학과 음악의 경계 또한 어느새 흐릿해졌다. UNIST의 어린 과학자들은 자신 안에 숨겨진 예술성을 정성껏 키워내는 데 힘을 쏟을 뿐이다. 언젠가 음악에서 얻은 영감으로 세상을 바꿀 연구를 해낼지 모르지만, 지금은 일단 음악 그 자체만으로도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