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에는 새로운 답이 필요하다. 아무도 하지 않았던 남다른 시도가, 경험하지 못한 특별한 시선이 세상을 바꾼다. 치매 치료제 연구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원인에만 집중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여러 원인을 동시에 잡는 ‘멀티타겟 치료제’라는 새 패러다임을 제시한 인물이 있다. 바로 UNIST 자연과학부 임미희 교수다. 그녀의 새로운 도전으로 불치병, 알츠하이머병 정복의 청신호가 켜졌다.
고령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알츠하이머 치매를 앓는 환자가 크게 늘고 있다. 2050년에는 전 세계 알츠하이머병 환자 수가 1억 명을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이를 방증하듯 지난 2005년 2573만 명이었던 알츠하이머 치매 환자는 2015년 3526만 명으로 1000만 명 가까이 늘었다.
치매는 일상생활을 방해할 정도로 기억력이나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병이다. 알츠하이머병은 치매의 60~80%를 차지하는데, 현대인의 10대 사망원인 중 유일하게 예방법이나 치료법이 없다. 치료라고 해봐야 고통 완화나 6개월에서 1년 정도 증상 지연이 고작이다.
알츠하이머병 치료를 위해 연구자들은 병의 원인을 없애는 데 주력한다. 보통은 한 가지 원인에 집중해 이를 완벽히 해결하는 방법을 찾는다. 임미희 교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알츠하이머병의 다섯 가지 가설 중 하나인 ‘아밀로이드-베타 단백질’에 집중했다.
“저는 아밀로이드-베타 단백질과 금속의 상호작용에 주목했어요. 지금까지는 신체 내 금속의 역할을 눈여겨보지 않았는데요. 생무기화학자인 제게 단백질과 금속의 상호작용을 보는 건 익숙했어요.”
알츠하이머병 연구에서 금속은 보편적인 주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몸 속의 주요 성분인 단백질 안에는 일정량의 금속이 들어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임 교수는 아밀로이드-베타와 금속 등을 따로 바라보던 방향에서 벗어났다. 각 요소 간의 상호작용을 추적하기로 한 것이다.
실험을 통해 그녀는 금속과 다른 원인 요소들의 다양한 상호작용을 발견했다. 이어 한 가지 원인이 다른 요소들과 이어졌다는 것까지 증명해냈다.
한 번에 고치는 ‘종합 치매 치료제’ 꿈꾸며
“질병 요소들이 연결된다는 건 하나의 원인만 제거해선 완벽하게 치료할 수 없다는 의미예요. 각 요소들이 상호작용해 병이 확장되고 파생된다는 뜻이기도 하죠. 결국 알츠하이머병을 완전히 치료하려면 병을 일으키는 모든 요소를 장악할 수 있는 ‘종합 치료제’가 필요해요.”
임 교수는 하나의 원인만 잡는다고 알츠하이머병을 정복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치료제 하나가 다양한 원인을 모두 잡는 ‘멀티타겟 치료제’가 필요했다. 2014년 그녀는 자신의 연구 계획을 학회에 알렸다. 학회는 뒤집어졌고 반박이 쏟아졌다. ‘왜 아무도 안하는 이상한 짓을 하느냐’는 선배 학자들의 반응이 주를 이루었다.
사실 멀티타겟 치료제는 유토피아 같은 이야기였다. 만든다면 더 없이 좋지만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게 학계의 생각이었다. 다양한 요소들을 모두 잡고자 하는 그녀의 결심은 과한 욕심처럼 여겨지기 충분했다.
주변의 우려에도 임 교수는 꿋꿋이 연구를 이어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멀티타겟 후보군들을 만들던 연구실의 한 학생이 그녀에게 물었다.
“교수님, DMPD(N,N-dimethyl-p-pheny lenediamine)와 같은 작은 저분자 화합물이 금속은 물론 아밀로이드-베타, 금속-아밀로이드-베타, 활성산화종, 라티칼종을 잡고 우리가 원하는 반응성을 주지 않을까요?”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DMPD를 맞은 알츠하이머병 쥐가 보통 쥐와 같은 수준의 인지‧학습능력을 일정 기간 회복했다. 단일 분자로 알츠하이머병의 다양한 원인을 한꺼번에 잡는 새로운 개념의 성공 가능성을 보인 것이다.
특히 DMPD는 보라색 염료로 시중에 다양하게 활용되는 화합물이다. 비교적 싼 가격에 구입할 수 있어 분자를 만드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일 필요도 없다.
임 교수는 드디어 알츠하이머병을 일으키는 가설을 한꺼번에 잡을 가장 작은 분자량을 가진, 경제적인 멀티타겟 치료제 후보를 발견한 것이다.
알츠하이머병 연구 영역을 넓히다
물론 아직 갈 길이 멀다. 치료제 후보를 발견한 것일 뿐 치료제 개발이나 상용화까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실험은 학계 전체에 긍정적인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녀의 연구법이 알츠하이머병 치료의 영역을 넓힌 것이다.
“2014년, 멀티타겟 치료제를 만들겠다고 선포하자 학계에서 비판이 쏟아졌죠. 하지만 2015년이 되자 멀티타겟 접근법에 대한 논문이 많이 소개됐어요. 제 접근법에 대한 학계의 긍정적인 반응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임 교수의 행보는 생무기화학자로서도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것이다. 학부 때 그녀를 지도했던 남원우 교수는 생무기화학 분야 석학이다. 남 교수팀에서 그녀는 소분자 활성화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하루에 3~40개 정도의 금속을 넣어 반응을 확인하고, 18개의 논문을써내며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때 다져진 탄탄한 기본기가 지금의 멀티타겟 치료제의 바탕이 되고 있다.
석사를 마치고 지도교수를 따라 경험했던 미국 실험실 역시 연구의 디딤돌이 됐다. 그녀가 박사 과정을 시작한 메사추세츠공대(MIT)의 실험실에서는 합성, 분석, 체외 반응성 테스트 등 연구의 전체 과정을 모두 경험할 수 있었다. 각 전문 분야에 맞게 특화된 실험실이 대부분이었던 한국과는 다른 체계였다. 이곳에서 실험의 전 과정을 흡수하기 위해 임 교수는 매우 부지런해져야 했다.
“저는 똑똑한 사람이 아니에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끝없는 노력뿐이었어요. 아주 어렸을 때 할머니 손에 맡겨진 적이 있어요. 엄한 할머니에게 혼나지 않으려면 새벽 4시에 일어나 저녁에 일찍 자는 생활에 익숙해져야 했죠. 할머니를 도와 논밭의 잡초를 뽑았는데 잡초를 더 많이 뽑은 곳에서 수확률도 높아지더라고요. 제가 노력한 만큼 더 많은 쌀과 과일을 얻을 수 있다는 걸 눈으로 확인한 경험이었죠. 그 이후로는 어떤 일이든 부지런하게 임했습니다. 그만큼 보상받을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Go!”… 꾸준한 끈기로 이어붙이는 연구
꾸준한 노력은 5년을 예상하던 박사 학위 취득을 3년으로 단축시켰다. 캘리포니아공대(Caltech)에서 박사 후 연구 과정을 거치고 미시간대 조교수로 임용되기 전, 임 교수는 인간의 뇌에 대해 좀 더 알아보기로 결심했다. 광활한 뇌 영역 중에서도 금속 관련 알츠하이머병에 대한 연구를하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박사과정 지도교수였던 스티브 교수는 걱정부터 했어요. 알츠하이머병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병이라고요. 게다가 이 질환에 관한 금속 연구로 미국에서 정년을 보장받은 교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당시까진 제 경력이 꽤 성공적인 편이었는데, 알츠하이머병 연구가 걸림돌이 될지 모른다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알츠하이머병의 세계로 용감하게 뛰어들었다. 그러나 연구를 시작한 지 2년이 지나자 지도교수의 걱정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알츠하이머병에 대한 연구는 하루에 70편씩 쏟아지지만 검증된 연구는 드물었던 것이다. 건설적인 연구를 이어 나가기가 쉽지 않은 형편이었다.
엎친 데 덮진 격으로 생무기화학자인 그녀가 생물학 중심의 치매 연구 분야에서 목소리를 내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각종 세미나에 초청을 의뢰하며 학계의 일원들을 만나기를 3년 정도 지속하자, 어린 여성 아시안 화학자에 대한 낯선 시선이 걷히기 시작했다. 알츠하이머병에 대한 화학적인 접근이 통한 것이다.
“그렇게 한창 연구를 하고 있을 때 당시 부총장이던 정무영 총장께서 미시간대를 방문했어요. 제게 UNIST로 이직하길 권하셨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한 번 와봤는데 새로 생긴 학교의 유연한 체계가 엄청 매력적이었어요.”
물론 그녀가 UNIST로 오려면 당시 진행하고 있던 과제의 연구비를 모두 내려놓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도전했다.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다시 한 번 연구를 시작한 것이다. 한국에서 자신의 연구 가능성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한 지 3년, 임 교수는 학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알츠하이머병 연구자가 됐다.
“만약 미국에서 누렸던 꽤 안정적인 환경에 그대로 있었다면 알츠하이머병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은 생각하지 못했을지 몰라요. 새로 실험실을 시작하면서 남들과 다르게 시도해야 살아남겠다 싶더라고요. 가장 작은 분자로 알츠하이머병을 유발하는 다양한 원인을 잡는다는 생각은 UNIST 덕분에 탄생한 겁니다.”
알츠하이머병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고 아시아인 여성 화학자로서 학계의 신뢰를 얻어내기까지. 미국에서의 안정적인 연구를 뒤로 한 채 UNIST에 터를 잡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녀 앞에는 무수히 많은 반대들이 놓여 있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안 되는 백 가지 이유에도 불구하고 이겨내야만 하는 이유에 집중했다.
그녀의 뚝심 있는 연구가 지속된다면 불치의 병이라 여겨졌던 알츠하이머병을 정복할 날이 멀지 않았다.
UNIST 자연과학부 소개
자연과학부는 화학과 물리, 수리과학 세 트랙으로 이뤄진 학부다.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을 관찰하고 발견해 인류의 삶에 기여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중 임미희 교수가 소속된 화학 트랙은 세계적 석학이 모여 세계 최고 수준의 트랙으로 성장하고 있다. 특히 현재 정부가 노벨상 프로젝트로 추진하고 있는 기초과학연구원(IBS) 캠퍼스 연구단 2곳도 화학 트랙의 연구진이 주도하고 있다. IBS 캠퍼스 연구단은 탄소 기반소재연구의 선도자인 로드니 루오프 특훈교수와 고분자 물리화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스티브 그래닉 특훈교수가 각각 단장을 맡고 있다. 이밖에도 크리스토퍼 비엘라프스키, 얀 우베 로데, 토마스 슐츠 교수 등 쟁쟁한 해외 석학들이 연구진으로 포진하고 있다. 또한 국가과학자인 김광수 특훈교수와 퇴행성 뇌질환 분야에서 탁월한 연구 업적을 쌓은 임미희 교수 역시 UNIST 자연과학부 화학 트랙의 막강한 연구진이다.
화학 트랙에서는 유기화학, 물리화학, 분석화학, 생화학, 재료 및 고분자화학, 나노과학 등 모든 분야를 다룬다. UNIST에서는 1학년 동안 기초과정부에서 교육받고 2학년부터 전공을 선택한다. 2가지 전공을 의무적으로 이수해야 하므로 화학 트랙과 화학공학 트랙을 동시에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물리나 생물, 공학 전공 학생도 화학 트랙을 함께 이수해 기초과학적 지식을 탄탄히 쌓을 수 있다. 화학 트랙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과 연구를 통해 학생들을 세계적인 화학자로 성장시키고 있다. 또한 과학자가 지녀야 할 자질을 습득시키며, 나아가 인류의 진보와 사회복지를 위해 일하는 최고 수준의 연구 인력 양성을 목표로 삼고 있다.
졸업 이후 화학과 졸업생의 진로는 크게 산업체와 대학원 진학의 두 가지로 나눠진다. 거의 모든 산업체가 화학을 이수한 전공자를 필요로 한다. 이 덕분에 석유화학산업, 고분자산업, 반도체 제조, 제지산업, 유화 산업, 제약회사, 화장품 관련 산업 등 다양한 분야로 진출할 수 있다. 화학 관련 전문연구소나 정부출연연구원에서 화학 전공자들의 활약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