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 1월은 ‘January’인데 그 어원은 라틴어 ‘Janus’, 즉 로마의 신 야누스다. 출입문의 수호신인 야누스는 문의 앞면과 뒷면처럼 머리 앞뿐 아니라 뒤도 얼굴이다. 본래 야누스는 수호신이라는 긍정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두 얼굴이 부각되면서 점차 부정적인 뉘앙스를 지니게 됐다. 오늘날 ‘야누스의 얼굴’은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을 빗대는 표현으로 즐겨 쓰인다.
UNIST 자연과학부 스티브 그래닉(Steve Granick) 특훈교수는 10여 년 전부터 ‘야누스 입자(Janus particle)’로 불리는 콜로이드 입자를 만들어 흥미로운 현상들을 밝혀내고 있다. 지름이 1㎛(마이크로미터, 참고로 머리카락 두께는 80㎛다) 내외인 공 모양의 야누스 입자는 표면의 절반만 특정 물질로 코팅해 전기적·자기적 특성이 나머지 절반과 다르게 설계돼 있다. 이 입자에 야누스란 이름이 붙은 이유다. 그래닉 교수는 야누스 입자가 액체에 분산된 상태, 즉 콜로이드 상태에서 외부 조건의 변화에 따라 야누스 입자가 매우 민감하게 반응해 다양한 행동을 보인다는 것을 규명해왔다.
사람의 사회에서 물질의 사회로
서구인인 그래닉 교수에게서 왠지 로마 시대 야누스 상의 이미지가 떠오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만나보니 아담한 체구에 인자한 미소에서 오히려 조선시대 퇴계 이황이 떠올랐다. 그래닉 교수는 인터뷰 내내 차분한 어조로 자신의 삶과 연구를 이야기했다. 그의 인생 경로는 차분한 인상과는 달리 ‘일탈적인’ 면도 있어 야누스 과학자(물론 오늘날 용법처럼 부정적 의미는 아니다)가 맞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렸을 때 월반을 할 정도로 영재였던 그래닉은 명문 프린스턴대에 진학해 1, 2학년 동안 다양한 강의를 들은 뒤 사회학을 전공으로 택했다. 사람들이 이루는 사회의 복잡한 측면을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3학년을 마친 뒤 돌연 휴학하고 사회에 뛰어든다. 사회학은 머릿속에서 하는 학문이 아니라 실제 사회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깨달아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일까. 그는 2년 동안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며 사회를 체험했다.
이때 그래닉은 자신이 사람들의사회보다는 물질들의 사회에 더 관심이 많다는 걸 깨달았고, 학교로 돌아와 화학 강의를 집중적으로 들었다.
당시 프린스턴대 화학과에는 유혁이라는 한국 유학생 출신의 젊은 교수가 있었는데 남다른 학생인 그래닉을 관심을 갖고 지켜봤다. 그래닉은 화학과 학생이 아니었지만 유혁 교수는 그의 지도교수 역할을 자청했다. 그리고 고분자에 관심이 많은 그래닉을 당시 저명한 고분자 학자인 위스콘신대 화학과 존 페리 교수에게 소개했다. 그래닉은 그 밑에서 박사과정을 밟게 된다.
그래닉 교수는 당시를 회상하며 “어찌 보면 학창 시절을 방황하며 보낸 것일지 모르지만, 다행히 이런 모습까지도 좋게 봐준 분들 덕분에 과학자의 길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며 자신은 행운아라고 말했다.
고분자 연구에서 트라이볼로지 분야까지
1982년 고분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래닉은 대서양을 건너가 콜레즈 드 프랑스의 물리학자 피에르 질 드 젠(Pierre-Gilles de Gennes)의 실험실에서 1년 동안 박사후연구원으로 지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때의 경험은 과학자로서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리 시대의 아이작 뉴턴’으로 불리던 젠 교수는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면서 새롭고 흥미로운 연구를 진행했다. 특히 액정과 고분자에서 나타나는 복잡한 현상에서 규칙성을 찾아 이를 수식화해 유명해졌고, 1991년 단독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그래닉 교수는 “미국으로 돌아와 일리노이대 교수로 일할 때 젠 교수의 수상 소식을 듣고 뿌듯해했던 기억이 난다”며 “이 분의 연구 능력이 한창일 때 같이 일할 수 있었던 건 행운”이라고 덧붙였다. “절대 한 분야에 머무르지 말라”는 젠 교수의 가르침에 따라 그래닉 교수는 고분자 연구와 함께 트라이볼로지(Tribology) 분야에도 뛰어들었다.
트라이볼로지란 마찰과 마모, 윤활에 관련된 현상을 다루는 학문 분야다. 주로 공학자들이 실용적인 측면에서 연구했지만 기초 연구는 미흡한 상태였다. 따라서 그래닉 교수 같은 과학자의 참여를 두 손 들어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덕분에 그래닉 교수는 공학자들과 함께 트라이볼로지 분야에서 많은 연구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스스로 연구 주제 잡아야 더 열심히 해
그래닉 교수는 학생들이 스스로 연구 주제를 정하도록 권장하는 편이다. 그래야 더 열정적으로 연구를 진행할 수 있고 책임감도 더 느끼기 때문이다. 야누스 입자 연구도 이렇게 시작됐다. 10여 년 전 한 대학원생(중국 유학생 홍리앙)이 콜로이드를 주제로 발표를 마친 뒤 그를 찾아왔다.
“교수님, 전 콜로이드 연구를 하고 싶습니다.”
“좋은 말이야. 그런데 뭘 하지? 이 분야는 이미 연구가 많이 돼 있어서….”
두 사람은 참신한 연구 주제를 고민했고, 그 결과 반쪽은 양전하를 띠고 나머지 반쪽은 음전하를 띠는 야누스 입자를 만들어 그 특성을 규명해보기로 했다. 이 대학원생의 친구가 다른 실험실에서 시뮬레이션 연구를 하고 있어 야누스 입자의 거동을 시뮬레이션으로 알아보는 연구도 함께 이뤄졌다. 이렇게 해서 야누스 입자를 만들고 실험과 시뮬레이션으로 특성을 파악하는 공동 연구가 진행됐다. 그 결과 야누스 입자들이 서로 뭉치는 현상이 관찰됐고 시뮬레이션에서도 그대로 재현됐다. 그 뒤 여러 뛰어난 학생들이 야누스 입자 연구에 뛰어들었고 흥미로운 결과들이 여럿 나왔다.
예를 들어, 2012년 학술지 <네이처(Nature)>에 실린 논문에서는 절반을 자성물질로 코팅한 야누스 입자가 분산돼 있는 콜로이드 용액에 색다른 방식으로 자기장을 가해줬을 때 입자들이 자기조립으로 원통 형태(마이크로튜브)를 만든다는 발견을 보고했다. 이때 자기장의 특성(세차 각도)을 조금만 바꿔도 마이크로튜브의 지름이 바뀐다. 올해 학술지 <미국립과학원회보(PNAS)>에 실린 논문에서는 야누스 입자의 행동 패턴에서 온도를 추정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보고하기도 했다.
연성물질에 대한 다양한 연구
그래닉 교수는 기초과학연구원(IBS)의 ‘첨단연성물질연구단’을 이끌고 있다. 연성물질(soft matter)이란 고분자와 액정, 콜로이드처럼 일정한 구조를 지닌 물질이면서도 일정 범위를 벗어나면 질서가 사라져 부드럽다고 느껴지는 물질이다. 예를 들어 금속은 넓은 범위에서 질서 정연한 배치를 지닌 ‘딱딱한’ 물질이지만 야누스 콜로이드 용액의 경우 입자 하나는 단단해도 입자 사이는 유동적이므로 연성물질이다.
그래닉 교수는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대다수가 연성물질”이라며 “그럼에도 결정 같은 단단한 물질에 비해 학계에서 연구가 부진한 편”이라고 말했다. 연성물질의 유동성을 이론으로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 결과 연성물질 분야는 주로 산업계에서 연구를 주도해왔으며 실용적인 측면에 치우쳤다.
연성물질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야누스 입자에서도 보이는 조건 민감성이다. 즉 변수를 조금만 바꿔도 물질의 특성이나 행동에 큰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생명체 역시 이런 특성을 보이고 생물의 구성단위인 세포의 내부는 연성물질로 이뤄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연성물질에 대해 더 많이 알수록 생명 현상에 대한 이해도 넓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래닉 교수팀이 2015년 학술지 <네이처 머티리얼스(Nature Materials)>에 게재한 논문이 좋은 예다. 세포를 하나의 사회라고 보면, 내부에는 구성원들이 사용하는 물건을 공급하는 도로망(미세소관)이 깔려 있고, 이를 운반하는 차량들(키네신 같은 분자 모터)이 준비돼 있다. 보통 이런 생체분자들의 임의적인 움직임은 브라운 운동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막상 현미경으로 관찰해보니 세포 안에서 물건(이 경우 엔도솜이라는 공 모양의 구조)을 운반할 때 브라운 운동이 아니라 ‘레비 워크(Lévy walk)’ 패턴을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프랑스 수학자 폴 레비(Paul Lévy)가 제안한 레비 워크는 임의적인 운동이면서도 브라운 운동과는 좀 다르다. 짧은 거리를 탐색하다가 어느 순간 먼 거리를 단숨에 이동해 다시 주변을 탐색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넓은 지역을 탐색할 때는 레비 워크가 더 효율적이다.
그래닉 교수팀의 연구로 세포 내 수송 시스템도 레비 워크를 따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세포 내 물질들은 도로(미세소관)가 하나뿐일 때는 순식간에 이동하고 교차로를 만나면 주춤하며 방향 전환을 한다. 이는 정보를 저장(기억)할 공간이 없는 생체분자도 레비 워크로 효율적인 운송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는 발견이다.
그래닉 교수는 “연성물질은 비록 지능이 없지만 이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조건을 찾는다면 어떤 지침을 줘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행동을 조절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과거에는 이런 조건을 찾는 게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었지만, 이 분야의 지식이 쌓이고 새로운 방법론과 실험 방법이 등장하면서 베일이 조금씩 벗겨지고 있다. 연구단은 콜로이드와 세포에서 작동하는 ‘비평형 상호연결 네크워크’를 규명하는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다양한 관점에서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다.
비평형이란 열역학적으로 안정한 상태가 아니라는 의미로 생명체는 다 비평형 상태다. 이런 융합 연구를 위해서는 물리학이나 화학 같은 기존 학문 분류 체계는 과감히 버려야 한다는 게 그래닉 교수의 생각이다. 연구단에 다양한 전공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도 그래닉 교수의 이런 철학이 반영된 결과다.
올해로 한국 생활 4년차인 그래닉 교수는 연구 환경은 물론 일상생활도 매우 만족스러워하고 있다. 현재 그의 실험실에는 10여 명의 연구원과 대학원생이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그래닉 교수는 한국 학생들의 아이디어와 성실성을 높이 평가했다.
그래닉 교수는 “앞으로는 전혀 다른 것들을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며 “이를 위해서는 학생 때부터 폭넓게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1세기 융합의 시대에 스스로를 기존 틀 안에 가두지 말라는 말이다.
글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서울대 화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지내며『강석기의 과학카페』, 『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를 저술했으며, 옮긴 책으로는 『반물질』, 『가슴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