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로봇 연구계의 산증인으로 불리는 변증남 교수가 2017년 2월 말 세상과 작별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몸 담았던 UNIST에서는 아들인 변영재 교수와 함께였다. 변 교수는 부친과 같은 학교에서 일했던 경험을 ‘더 없이 소중하고 귀했다’고 전하며, 아버지이자 인생 선배로서 변증남 교수를 돌아봤다. <편집자 주>
변증남 교수는 2009년부터 UNIST 전기전자컴퓨터공학부 석좌교수로 5년간 재직했고, 소천할 때까지 UNIST 명예교수였다. 개교 초 UNIST가 틀을 잡는 데 힘썼을 뿐 아니라 기초과정부 학부장으로서 신입생의 대학생활을 돌보기도 했다. 필자에게는 부친인 동시에 ‘과학자의 길을 가르쳐주신 인생의 본보기’였다.
지능을 가진 로봇, 약자를 돕는 로봇 기술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보면 아버지는 ‘참 열심히 연구하는 분’이었다. 로봇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하던 1970년대에 산업현장에서 인간의 팔처럼 일할 기계장치에 집중했고, 1979년 최초의 국산 로봇 머니퓰레이터 ‘카이젬(KAISEM)’를 개발했다. 1989년에는 비전 센서를 갖춘 4각 보행 로봇 ‘센토(Centaur)’를 내놓으며 국내 로봇 연구를 주도했다.
당시로선 이 정도만 해도 획기적인 일이었지만 아버지는 다른 도전을 시작했다. 로봇이라면 인간처럼 생각하고 소통도 가능해야 하는데, ‘딱딱한 기계장치’로는 한계를 느꼈던 것이다. 1990년대 초반 아버지의 연구는 로봇에 ‘지능’을 더하기 위해 ‘퍼지이론’(불확실함의 양상을 수학적으로 다루는 이론)을 접목하는 방향으로 이어졌다. 지금은 딥러닝이나 인공지능 등의 개념이 널리 알려졌지만, 그때만 해도 로봇에 지능을 더한다는 건 아주 새로운 개념이었다.
아버지는 음악에도 조예가 깊은 분이셔서 로봇의 활동 영역으로 ‘오케스트라 지휘’도 고려했다. 지휘자는 오케스트라의 구성원들이 각각 어떻게 연주하는지 파악하고, 각자에게 적절한 신호를 줘서 전반적인 화음을 이끌어내는 사람이다. 로봇에 퍼지이론을 적용하면 지휘봉으로 단순히 삼각형을 만드는 동작을 넘어 실제 지휘에 가깝게 행동하도록 구현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 연구는 1992년 미국에서 개최됐던 로봇학회에서 발표됐다. 그런데 학회 참석자 중 하나가 이 기술을 응용해 청각장애인과 대화할 수 있는 ‘수화 로봇’을 개발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이 아이디어에 영감을 받은 아버지께서 집에 오셔서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가족들에게 수화 로봇 이야기로 열변을 토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후 아버지는 청각장애인이 특수한 장갑을 끼고 수화를 하면 그것을 글로 나타내주는 변환장치 등 수화 로봇 연구를 계속했다. 이런 기술들을 조금씩 발전시키면서 아버지의 연구 분야는 재활 관련 로봇 분야로 넓혀졌다. KAIST에서 은퇴할 때까지도 인간친화-재활 로봇 분야 공학연구센터(ERC)의 수장으로서 많은 업적을 남기고 제자들을 길러냈다.
‘전자공학’을 가업으로 삼은 부자지간
고등학교 시절 필자는 건축공학이나 의학 분야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면서 생각을 바꿨다. 아버지가 말씀해주신 ‘일본의 도제 문화’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당시 아버지는 “일본에서 대대로 가업을 잇는 도제 문화가 있어 훌륭한 기술들이 많이 나오는 것 같다”며 “대대로 전자공학을 연구하다 보면 3대쯤에는 노벨상을 받을 만한 연구를 할 수 있지 않겠냐”고 말씀하셨다. 필자는 전자공학을 가업으로 삼고 그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전자공학을 깊이 있게 다루다 보니, 로봇 분야에서 아버지의 업적이 더욱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그 자체가 ‘넘어야 할 산’으로 생각되기도 했다. 우스갯소리로 종종 하는 이야기지만 필자는 아버지보다 더 잘할 수 있는 게 좋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수학 기반의 제어이론에서는 아버지를 따라잡기 어렵지만 반도체 분야에서는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 특히 반도체 회로 설계라면 아버지보다 잘 해낼 자신이 있었다. 필자가 대학원에서 아날로그 반도체 회로 설계에 더 열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설계한 반도체 회로를 물리 계층으로 표현하는 ‘레이 아웃(lay out)’ 작업은 꽤 마음에 들었다. 어렸을 때 좋아한 건축과 아주 흡사해서다. 필자는 이 연구에 흥미를 느꼈고 회로 설계 분야를 전문적으로 파고들었다. 주말에 온 가족이 모일 때면 우리는 각자의 연구에 대해 소개했고, 아버지는 자신과는 또 다른 영역을 개척하는 필자를 인정해줬다. 각자의 분야를 존중하며 대화를 나누던 시간들은 더 없이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원칙’과 ‘열정’ 강조한 아버지처럼
아버지는 살아생전 『원칙의 울타리』(2009년 출간)라는 책을 내셨는데, 제목처럼 평상시에도 늘 ‘원칙’을 강조하면서 실천하는 분이었다. 또한 ‘열정’의 중요성도 늘 강조했다.
특히 배움에 대한 열정이 남달라서, 투병 중에도 완쾌되면 일본으로 여행가기 위해서 일본어 공부를 새로 시작할 정도였다. 그런 원칙과 열정은 아버지의 삶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지난 2월 23일 혈액암으로 별세한 아버지를 찾았던 수많은 조문객과 필자도 몰랐던 제자들의 기억이 그것을 방증한다.
이제 겨우 교수 8년차인 필자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기본으로 삼아 열정적으로 공부하고 연구할 계획이다. 목표는 지금보다 크게 성장한 전자공학자가 되는 것이다. 지칠 때마다 아버지를 거울삼아, 당신이 이 나이 때 어떻게 했을지 떠올린다.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멘토를 필자는 아주 가까이서 찾은 셈이다.
UNIST 학생들도 존경하는 멘토를 본보기 삼아 자신만의 원칙을 지키면서 열정을 갖고 공부해주길 바란다. 그것이 필자의 아버지이자 여러분의 스승인 변증남 교수의 뜻이기도 하다
글 변영재 전기전자컴퓨터공학부 교수
변영재 교수는 우리나라 반도체 센서 분야를 이끄는 젊은 연구자다. 변 교수는 1명의 박사 후 연구원과 15명의 대학원생들로 연구팀을 꾸려 ‘투명 지문인식 센서 반도체’와 체내 이식형 혈당 측정을 위한 ‘무선전력전송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최근에는 반도체 회로 설계뿐 아니라 ‘안테나 기술’까지 범위를 넓혀 차폐환경에서 통신 가능한 자기장 표면파를 연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