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19대 대통령 선거 날이다. 예기치 않은 정국으로 장미 대선이 치러지면서 비교적 짧은 선거일정을 거쳐 드디어 선거 날이 온 것이다. 필자는 공학도로서 매사에 ‘효율’에 대한 고민을 습관적으로 하는 것 같다. 효율은 다르게 표현하면 투입된 시간, 에너지, 예산 등에 비해 얻어지는 출력, 기대효과, 결과치에 대한 비율인 ‘가성비’와 상통한다. 갑자기 장미 대선이 결정되고, 상대적으로 정상적인 대선에 비해 대선 준비기간과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주어진 물리적 시간이 상대적으로 짧다 보니 ‘효율’에 대한 고민을 안할수 없는 선거였다.
그 어떤 선거운동에서도 네거티브 전략을 안 쓰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이번 19대 대선 또한 네거티브 전략이 그 어느 때보다도 난무했다. 돌이켜 보면 주어진 시간이 워낙 짧다 보니 효율적인 선거운동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우리 옛말에 ‘공든 탑이 무너진다’는 말이 있다. 모두 느낀바 있겠지만, 신뢰와 명성을 쌓는 것은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들어가는 일이다. 반면 한번의 실수로 그간 쌓은 신뢰를 한 순간에 잃어버릴 수 있다. 효율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네거티브 전략만큼 가성비가 좋은 전략도 없나 보다. 그런데, 과연 효율이 인생의 전부인가? 스스로 반문해보면, 때로는 비효율적이라도 인간적인 면을 지키는 것이 아름다운 인생을 사는 법이다.
요즘 할리우드 공상과학 영화 중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 중 하나로, 인간이 사랑하는 것은 오로지 종족 번식을 위한 것으로 정의하고, 남녀 간의 감정적인 사랑을 금지하는 내용이 종종 등장한다. 즉, 번식만을 위한 사랑이 있을 뿐, 감정의 소모(?)는 금지하는 설정인 것이다. 효율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남녀가 감정적으로 끌리고 감정에 호소하느라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인 과정일 것이다. 하지만, 효율만 생각 하는 것이 과연 인간적일까?
이번 대선 경쟁과정에서 TV 토론이나 유세 현장에서 각 후보들이 네거티브 공세를 가하는 모습을 보면서 효율을 계산한 전략이라는 것을 이해는 하면서도, 어쩌면 좀 더 ‘인간적인 전략’을 폈으면 어땠을까 상각해보았다. 실제로 인공지능이 대선 후보로 나섰으면 어떤 풍경이었을까? 인공지능 기술이 발달하면서 가까운 장래에 위협받는 직업 중에는 법률 전문가 직종이 포함되어 있다. 인공지능은 방대한 양의 법전 구석구석을 모두 알고 있고, 기록으로 남아 있는 모든 사건에 대해서 세세하게 파악하고 있다. 그 어느 인간 법률가보다 방대한 양의 데이터베이스를 분석할 수 있고, 뇌물이나 혈연, 지연과 상관없이 냉정하고도 가장 객관적인 판단을 내려 줄 수 있다. 더 나아가, 직접적인 영향력은 없지만, 국내의 사건 케이스나 법률에 국한되지 않고, 기록된 전 세계의 모든 법전과 판례도 비교하고 분석해 객관적이면서도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도 있다.
비슷한 논리로, 인공지능이 대통령 후보로 뛴다면 역대 모든 대통령들의 공약과 집권 기간 중 실적까지 모두 파악하는 것은 물론 현재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모든 분야에 걸친 현황 데이터를 분석하고, 관련 규정, 시행령, 법령을 모두 검토해 현재 존재하는 법에 상충되지 않은 범위에서 공약이나 정책을 제시할 수 있을지 모른다. 더 나아가, 인공지능 대선 후보는 지역감정이나, 학연, 지연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인선에 있어서도 객관적인 데이터를 토대로 필요한 사람을 등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최근에 문제가 되고 있는 ‘비선실세’를 두지도 않을 것으로 생각되니, 정말 ‘완벽한’ 우리의 대선 후보가 될 수 있지는 않았을까?
만약에 인공지능이 대통령 후보로 나와 대선 공략을 스스로 정해야 했다면, 보다 효율적인 선택을 했을지, 아니면 보다 ‘인간적인’ 후보가 되고자 하는 스스로의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그 어느 인간 후보보다도 더욱 ‘인간다운’ 전략을 폈을까? 경쟁후보를 비난하는 네거티브보다는 국민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표현하려고 노력했을까? 갑자기 필자도 궁금해진다.
변영재 UNIST 대외협력처장 전기전자컴퓨터공학부 교수
<본 칼럼은 2017년 5월 9일 경상일보 18면에 ‘[아름다운 선거]‘인간적인’ 후보와 ‘효율적인’ 대선후보의 경쟁’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