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코로나19 관련 2차 긴급재난지원금 및 통신비 지급을 보편적으로 할 것이냐 아니면 선별적으로 할 것이냐가 이슈가 됐다. 우리나라는 보편복지와 선별복지가 혼재하고 있었으나, 최근 보편복지에 대한 요구가 강해지고 있다. 양자는 각기 장단점이 있다. 선별복지는 소득 재분배 효과가 있고, 보편복지는 수혜자 비수혜자 사이의 갈등이 적다. 지금 우리 사회는 여러 가지 사회·경제적 불평등 문제로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다. 그렇다고 모든 소득계층에게 돈을 뿌리는 식의 보편적 복지가 ‘정의로운’ 것인지에 대해서는 한번 생각해 볼 문제다.
미국 사회의 정의의 기초를 수립한 존 롤즈(John Rawls)는 정의를 ‘평등’과 ‘차등’의 두 개의 원칙으로 설명한다. 평등의 원칙은 모든 사람은 최대한으로 동등한 기본적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자유·평등의 원칙이다. 둘째로 차등의 원칙은 평등의 원칙으로 야기되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 혜택’이라는 차등의 원칙에 따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 롤즈의 정의는 자유·시장주의를 기본 원칙으로 하나 이로 인해 생겨나는 경제적 불평등을 약자에 대한 차등적 혜택으로 보호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의로운 사회는 ‘정의롭게’ 분배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이러한 분배적 정의를 아리스토텔레스는 각자에게 각기 ‘합당한 몫’을 배분하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정의로운 사회는 승자의 몫을 빼앗아 약자에게 주는 사회가 아니라 약자를 보호하되 승자도 그에 합당한 몫을 받는 사회다.
우리 사회가 어느 때부터 정의라는 이름 아래 보편성이 남발되고 승자가 합당한 몫을 받지 못하는 사회가 돼 가고 있는 것 같다. 승자를 억누르고 약자를 과대 보호하는 사회는 결국 사회 전체가 하향 평준화된다. 롤즈의 약자에 대한 최소 극대화 원칙도 결과의 평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약자가 ‘어느 수준’에 이를 때까지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약자도 사회적 지원을 받아 스스로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에 경쟁이 있어야 한다. 경쟁이 없는 사회는 발전할 수 없다. 다만 그 경쟁은 정의로워야 한다. 정의로운 경쟁은 상대방을 무너트리는 파괴적 경쟁과 다르다. 상대방도 배려하는 상생적 경쟁이다. 대기업이 가격 경쟁으로 중소기업을 무너뜨리면 시장은 붕괴하고 소비자는 독점가격으로 피해를 본다. 파괴적 경쟁이다. 그러나 1등의 기술을 뛰어넘으려는 경쟁은 생산적이고 창조적이다. 모두가 혜택을 받는 ‘윈-윈(win-win)’의 경쟁이다. 자본주의를 비난하는 자들은 시장에서의 경쟁은 잔인하게 탐욕을 추구하여 이기심을 조장하며, 자원의 최적 사용을 저해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인간의 타인에 대한 동정심이 자본주의 시장에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공공의 선’을 가져온다고 했다. 이러한 경쟁이 정의로운 경쟁이다. 이를 망가트린 것은 ‘인간의 탐욕’이지 시장의 경쟁이 아니다. 2008년도 발생한 금융 위기도 인간의 돈에 대한 과도한 탐욕이 주된 원인이다. 그래서 시장의 경쟁을 탓하기 전에 상호 배려를 상실한 인간성을 탓해야 한다.
특히 4차 산업혁명 시대는 보다 치열한 경쟁을 요구한다. 삼성은 애플과 좋든 싫든 경쟁을 해야 한다. 그래서 ‘초격차’기술 개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러한 창조적 경쟁의 역할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BTS(방탄소년단)가 세계 음악 시장을 석권하고 소속 회사의 주식 상장에 50조 원의 투자 자금이 몰렸다고 해서 사람들은 이를 불평등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의 창조적 경쟁으로 사회 전체가 누리는 혜택이 더 크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창조적 경쟁이 살아나야 경제가 산다. 다만 그 경쟁은 정의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상호 배려하는 인간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그래서 인간성에 대한 교육이 시급하다. 우리의 젊은 세대가 원하는 것은 공짜 복지가 아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정의로운 경쟁이다. 노벨 경제학 수상자 하이에크는 공짜 복지는 결국 사람들을 영속적 약자로, 다른 사람에게 기생하는 연금생활자로, 그리고 정치권에 종속되는 ‘노예의 길’로 만들 것이라고 했다. 자본주의가 초래한 격차의 문제를 부동산 규제, 공정경제 3법 등 정부의 규제로만 접근해서는 안 된다. 승자의 창조성도 인정받는 자유로운 시장이 살아야 한다. 사회주의가 실패한 것은 사람들이 공짜 복지의 타성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도 인간성의 문제다. 약자가 배려받는 사회는 필요하다. 그러나 승자도 제 몫을 받는 정의로운 경쟁이 있어야 우리나라 경제도 다시 살아날 것이다.
정구열 유니스트 기술경영전문대학원 명예교수
<본 칼럼은 2020년 10월 12일 부산일보 22면 ‘[중앙로365] ‘정의로운 경쟁’’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