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부총장이라는 막중한 보직을 맡고 있어서 그런 선입관이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이재성 UNIST 에너지 및 화학공학부 교수의 세련된 정장 차림에서 과학자보다는 행정가의 향기가 났다. 그런데 이 교수가 지나온 삶과 연구에 대해 입을 열면서 이런 선입견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신입사원 시절 공장에서 겪은 사고가 오늘의 자리에 있게 한 계기가 됐다는 이야기는 마치 소설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야간근무를 하다 미끄러져 한쪽 발이 유기용매가 담긴 통에 빠졌죠. 큰 화상은 아니었는데 치료가 잘못돼 조직이 손상되면서 결국 피부이식까지 하게 됐습니다.”
1977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전신인 한국과학원(KAIS)에서 화학공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청년 이재성은 삼성석유화학에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는 우리나라가 본격적인 중화학공업 국가로 발돋움하던 시기이고, 삼성석유화학도 울산에 공장을 짓고 있었다. 1979년 공장이 완공되자 그는 울산으로 내려가 공정 엔지니어로 스타트업(start up) 업무를 맡았다.
공장 사고로 피부이식수술 받아
“스타트업이란 공장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는 조건을 찾는 과정입니다. 어찌 보면 꽤 위험한 시기죠.”
원료를 넣고 특정 조건에서 반응을 시킨 뒤 결과를 본 다음 내용물을 빼내고, 다시 원료를 넣고 조건을 조금 바꿔 반응을 시키고 결과를 본 뒤 내용물을 빼내고… 이런 식으로 최적의 조건을 찾는 실험이 이어지다 보니 현장은 온통 물바다였다. 작업자들이 고인 물을 쉽게 빼려고 쳐놓은 펜스를 치운 게 화근이 돼 뜻밖의 사고가 났다.
“두 달 동안 입원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공부를 더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다행히 아내도 선뜻 동의해 본격적인 유학준비를 했죠.”
사실 그가 회사에 들어간 건 가정을 빨리 이루고 싶은 열망이 컸기 때문이다.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다니던 시절 사귄 여자친구와 결혼을 하려고 1975년 졸업과 동시에 입사했다. 회사의 배려로 한국과학원에서 석사를 받은 뒤 결혼했고 행복한 생활을 했다. 그러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브레이크가 걸린 것이다.
“준비기간이 짧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다행히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입학통지서가 왔습니다.”
1980년 유학길에 오른 늦깎이 대학원생 이재성은 외국 생활이 만만치 않음을 깨달았다. 특히 그가 염두에 뒀던 바이오공학 분야 교수가 외국인에 대한 거부감이 크다는 걸 알고 실망했다. 또한 영어구사력이 현지인 수준이 안 될 경우 실험실에서 버티지 못한다는 정보를 듣고는 촉매 실험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사실 촉매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흥미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삼성석유화학의 공장은 미국 회사와 합작해 지었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다른 기술은 다 공개해도 유독 촉매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더군요. 보내준 자료가 한 더미였지만 촉매 부분은 한 페이지에 불과했습니다.”
회사원 시절 화학반응공정에서 촉매가 핵심이라는 걸 간파했던 이재성 교수. 그는 ‘촉매를 연구하는 게 운명’이라고 생각했고, 열심히 노력해 4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지도교수가 공동설립자인 촉매회사에 들어가 연구를 이어나갔다.
“하루는 퇴근해보니 한국과학원 은사인 김영걸 교수님으로부터 편지 한 통이 와 있더군요. 새로 생긴 포항공대(POSTECH)로 같이 가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얼마 뒤 김호길 POSTECH 총장이 한인 과학자 유치작업을 하러 미국에 왔고 김 총장의 달변에 깊은 인상을 받은 그는 포항공대에 가기로 결심을 굳혔다.
“물론 모험이었습니다. 하지만 은사님의 선택과 김호길 총장의 비전을 믿어보기로 했죠.”
1987년 첫 신입생을 뽑은 POSTECH는 주위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짧은 기간에 우리나라의 명문 공대로 우뚝 섰다. 이재성 교수는 POSTECH에서 촉매연구를 계속했고 자리가 잡힌 뒤에는 여러 보직을 맡으며 학교 발전에 힘을 보탰다. 27년 동안 POSTECH의 성장을 지켜본 이 교수는 2013년 UNIST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산화탄소, 저장에서 활용으로
이 교수는 촉매 가운데서도 광촉매, 즉 빛의 도움을 받는 촉매를 연구하는 데 관심이 많다. 이렇게 된 계기는 인류가 지구온난화 문제의 심각성을 본격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온실가스 배출 증가가 지구온난화의 주원인이라는 데 각국이 동의하면서 1997년 교토의정서가 채택됐고 우리나라도 더 이상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각국에서 대표적인 온실가스인 이산화탄소를 회수하거나 재활용하는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중화학공업 비중이 높은 우리나라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많았고(지금도 세계 6위), 당시 우리나라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10%를 차지하는 포스코는 이재성 교수팀을 비롯한 여러 곳에 CO2전환연구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산화탄소를 수소와 반응시켜 메탄올을 만드는 반응을 도와주는 촉매를 개발하는 연구를 했습니다. 그런데 상용화를 하려다보니 문제가 있더군요. 공정에 들어가는 비용의 대부분이 수소(H2)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겁니다.”
수소는 천연가스처럼 지하 어딘가에 매장돼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천연가스나 나프타에서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 많은 에너지가 들어가는 데다 이산화탄소까지 발생한다. 결국 이산화탄소를 활용하기 위한 반응 원료를 만드는 과정에서 이산화탄소가 더 많이 나오는 모순에 빠졌다.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지 않고 수소를 만드는 방법을 찾다보니 식물의 광합성에 주목하게 된 것이죠.”
식물은 엽록체에서 빛에너지를 이용해 물과 이산화탄소로 당(유기물)과 산소를 만든다. 광합성은 명반응과 암반응으로 나눠진다. 먼저 빛이 필요한 명반응에서는 물 분자(H2O)가 산소 분자(O2)와 수소 이온(H+) 전자(e-)로 쪼개진다. 수소 이온과 전자는 NADP+라는 분자와 결합해 NADPH가 된다. 다음으로 빛이 없어도 되는 암반응으로 NADPH와 이산화탄소가 반응해 당 분자가 만들어진다.
따라서 광합성 명반응에서 수소 이온과 전자가 바로 결합하면 수소 분자를 만들 수 있다. 2011년 미국 하버드대 다니엘 노세라 교수팀은 태양광 발전에 쓰는 실리콘 반도체를 광양극으로 쓰고 물을 쪼개는 데 코발트포스페이트 촉매를 쓰는 시스템을 개발하면서 ‘인공나뭇잎(artificial leaf)’이라는 멋진 이름을 붙였다.
이재성 교수팀도 인공나뭇잎 연구에 뛰어들었고 2015년 학술지 ‘ACS나노’에 새로운 유형의 인공나뭇잎을 소개했다. 즉 비스무트바나듐산화물을 광양극으로 쓰고 코발트포스페이트 촉매를 쓰는 시스템으로 광양극의 성능을 보완하기 위해 페로브스카이트 태양전지를 추가한 게 포인트다. 페로브스카이트는 새로운 태양전지로 각광받는 물질로 제조비용이 실리콘 반도체의 5분의 1 수준이다. 내구성 등 몇몇 문제가 해결되면 널리 사용될 전망이다.
지난해 이 교수팀은 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에 기발한 유형의 인공나뭇잎 시스템을 소개해 주목을 받았다. 이 시스템은 두 가지 광양극을 써서 빛 흡수 효율을 극대화했다. 기존 비스무트바나듐산화물 광양극은 510nm보다 짧은 파장의 빛만 흡수했는데 여기에 620nm까지 흡수하는 산화철 광양극을 별도로 달아 시스템의 효율을 7.7%까지 끌어올렸다. 인공나뭇잎 상용화 기준으로 여겨지는 10%에 가까워졌다. 연구팀은 2019년까지 10%를 달성한다는 목표로 후속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한편 이 교수팀은 올해 3월 학술지 ‘응용촉매 B’에 흥미로운 논문을 발표했다. 이산화탄소와 수소로 메탄올이 아닌 탄화수소를 만드는 과정을 개발했다는 내용이다. 탄화수소는 탄소와 수소로 이뤄진 분자로 휘발유나 디젤이 여기에 속한다. 따라서 이 반응이 효과적으로 일어난다면 메탄올을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쓸모가 많다.
사실 이산화탄소와 수소에서 탄화수소를 만드는 반응은 이미 나와 있지만 중간에 일산화탄소를 거친다는 게 단점이다. 그런데 이 교수팀은 이 과정을 생략하고 바로 탄화수소를 만드는 촉매 시스템을 개발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게다가 구리와 철 같은 흔한 금속을 써서 델라포사이트(delafossite)라는 독특한 구조로 합성한 촉매이기 때문에 상용화 가능성이 그만큼 더 크다.
이 교수팀은 이 시스템을 좀 더 개량한 뒤 제철소나 화력발전소에 데모플랜트(demo plant)를 지어 운영할 계획이다. 데모플랜트란 반응 규모를 키운 설비로 상업화 여부를 최종적으로 검토하는 단계다. 이 모든 과정이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10년쯤 뒤에는 우리나라도 ‘산유국’으로 불리지 않을까.
“물론 그렇게 되면 좋겠죠. 하지만 설사 우리가 실패하더라도 이 분야의 연구는 계속될 것이고 그래야만 합니다.”
2015년 12월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195국이 참여한 파리기후협정이 발효돼 ‘신(新)기후체제’에 들어갔다. 온실가스 감축은 꼭 해내야 하는 지상과제가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는 2030년 온실가스 배출 목표를 5.4억 톤으로 약속했는데 이는 전망치 8.5억 톤에서 37%나 줄인 수준 벅찬 목표다. 참고로 2013년 우리나라 온실가스 배출량은 7억 톤이다.
“과거에는 CCS(이산화탄소 포집과 저장)기술에 기대를 걸었지만 지금은 CCU(이산화탄소 포집과 활용)으로 초점이 이동하고 있습니다. 포집한 이산화탄소를 저장할 공간도 마땅치 않고 비용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죠.”
특히 우리나라는 저장 공간이 더 없어서 이산화탄소를 활용하는 연구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이번 이 교수팀의 연구결과가 많은 주목을 받은 이유다.
“이산화탄소는 굉장히 안정한 분자입니다. 이런 분자를 수소와 반응하게 해 탄화수소로 바꾸는 촉매는 정말 대단한 존재죠.”
40년 가까이 촉매를 연구했지만 이 교수에게 촉매는 여전히 신비로운 대상이면서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존재다.
“요즘 인공지능 때문에 사람 일자리가 없어졌다고 걱정을 하지만 창의성이 필요한 일은 결국 사람의 몫입니다.”
과학이나 공학이야말로 여전히 사람의 창의성이 빛을 발할 수 있는 분야라는 말이다(물론 앞으로 인공지능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게다가 한 세대 전에 비해 국내 연구여건이 많이 좋아졌기 때문에 관심과 열정만 있으면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다.
“다행히 이 분야에 관심있는 학생들이 많고 실험실에 들어와서도 열심히 연구하고 있어 선배로서 뿌듯합니다.”
이 교수는 후학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일이 인류의 삶을 향상시키는 데 공헌할 것이라는 자부심이 느껴진다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글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서울대 화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지내며『강석기의 과학카페』, 『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를 저술했으며, 옮긴 책으로는 『반물질』, 『가슴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