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혁신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과학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모두가 자명하게 알고 있을 거라는 편견이야말로 과학을 제대로 연구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의 진화(1938년)”라는 책에서 “Science is state od minds filled with concepts and ideas freely invented”라고 정의했다.
이 정의에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뉴턴의 후계자임을 자처했던 아인슈타인이 ‘과학은 마음의 상태’라고 한 점이다. 개념적(Concept) 지식, 이성과 논리에 기초한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만들어내는 것이 과학이라고 했다면 쉽게 이해가 되겠지만, 과학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쉽게 와 닿지 않을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정의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그의 의도를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 과학기술 혁신의 실마리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격물치지(格物致知)와 하필왈리(何必曰利)
과학은 곧 우리 인간의 마음이라는 관점에서 두 가지 생각을 해본다. 첫 번째, 과학자의 마음, 즉, 인간의 마음이 과학의 핵심적인 환경이라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혁신을 위해서는 과학기술의 환경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과학 혹은 우리 사회의 환경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듯 하다.
환경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예를 들어보면, 평소에 어려운 수학문제를 잘 풀던 학생도 배가 고프면 그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할 수 있다. 지나치게 추운 날씨에는 축구선수들이 실력을 발휘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집안에 우환이 생긴 직장인은 평소에 잘 수행하던 업무에 집중할 수 없게 된다. 이 세 가지 예에서 환경은 배고픔, 추운 날씨, 집안의 우환 때문에 생긴 걱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도 마찬가지이다. 과학자도 경제적 어려움, 미래 생활, 노후에 대한 걱정, 자녀교육에 대한 고민, 지나친 스트레스를 앓지 않을 때 과학을 제대로 할 수 있다. 연구비, 기자재 등과 같은 연구 생태계, 과학기술정책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 마음이 과학의 환경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는 유교 경전 대학(大學)에서 오래전 이야기 되었었다. 격물치지(格物致知)가 그것인데, 격물치지의 두 번째 글자 물(物)은 원래 사물(事物)이다. 사(事)는 인간의 일이고, 물(物)은 자연의 일이다. 인간의 일과 자연의 일은 지극히 알면 통한다는 뜻으로 아인슈타인이 얘기했던 과학은 인간 마음의 상태라는 정의와 일맥상통한다.
두 번째 생각은 정의(正義)이다. 과학에 있어 왜 정의가 중요한가를 살펴보겠다. 맹자(孟子)라는 책은 양혜왕이 맹자에게 어떻게 하면 백성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국가의 이익’을 만들어 낼 수 있느냐고 묻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에 맹자는 “하필왈리(何必曰利)”라고 답을 한다.
양혜왕은 백성들을 위해서 국가의 이익을 언급하였는데, 맹자는 왜 하필 ‘이익’을 얘기하느냐고 반문한다. ‘이익은 이익을 쫓아 추구해서는 이룰 수 없다’라고 말한 것이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이면 이익은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다고 맹자는 설명했다.
이익이 있는 곳에 이득을 얻으려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과 사람들이 모여 이익이 발생하는 상황은 엄연히 다르다. 사람들이 모이려면 그곳에는 정의가 있어야 한다. 이익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이지만, 이익이 사라지면 사람들은 미련없이 떠난다. 반대로, 정의가 있는 곳에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는다.
정의는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맹자의 하필왈리와 연결하여 이해해 보면, “이익을 접했을 때, 내가 이 이득을 취해도 되는가?”하고 자문해 보는 것이다. 과학과 기술로 인해 만들어지는 엄청난 재화와 이익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보면 그 사회의 정의는 자명해진다. 모든 사람이 눈앞에 있는 이득을 과연 취해도 되는 것인지 묻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이다. 과학기술도 마찬가지다. 정의가 있는 곳에 과학자들도 모이고 과학기술의 혁신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이야기와 소통은 다르다
과학은 인간의 마음이라는 이야기를 통해, 과학의 환경은 인간 마음이라는 것, 그리고 과학혁신의 원동력은 정의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즉, 과학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인간의 마음이고, 과학과 기술로 인해 만들어진 이익을 지켜내고 새로운 혁신으로 이어주는 것도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럼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얻고 지킬 수 있을까? 또한, 그러한 마음들을 과학기술로 향하게 하며,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과학에 관심(역시 마음)을 가지게 할 수 있을까? 그 해답을 과학적 소통에서 찾고자 한다. 먼저 소통이란 무엇인가? 이야기하는 것과 소통은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사회에 어떤 방법으로든 기여하고 싶어 한다. 내가 만든 물건을 사람들이 사용하고, 내가 적은 글을 사람들이 읽고, 내가 만든 노래를 사람들이 즐길 때, 내가 농사한 농산물을 사람들이 먹고 살아갈 때, 내가 참여하여 만든 법, 내가 만든 정책과 내가 행한 정치로 사회가 정의로워질 때, 우리는 보람과 행복, 그리고, 살아있음을 느낀다. 우리는 이를 ‘소통’이라고 한다.
소통하기 위해서는 사회 속에서 살아야 하며, 사회 속에서 소통하려면 끊임없이 선택할 수밖에 없다. 선택은 개인의 몫이지만 그 선택은 늘 의미와 동행한다. 과학자도 선택한다. 농부도, 음악가도, 정치가도, 사업가도 선택한다. 그 선택들이 모여, 우리가 사는 사회의 공통 분모로써의 의미가 되고, 그 의미들이 서로 소통하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제안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전혀 선택할 수 없게 강요한다면 소통이 될 수 없다.
그럼 과학자의 소통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과학은 과학자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함께 할 때만이 완성된다. 예술인에게 무대와 관객이 필요한 것과 다르지 않다. ‘인간의 마음’이라는 과학을 하는 과학자라면 현 시대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외면할 수 없다. 지구촌의 여러 문제, 그리고 한국이라는 사회가 안고 있는 어려움을 외면한 과학은 일반 시민들의 마음을 얻기 힘들기 때문이다.
과학자, 과학기술자는 지금 일반인과 소통하고 있는가? 혹시 우리는 경제적 소통을 과학의 소통이라고 오해하고 있지 않는가? 과학의 목적을 산업화, 경제발전 기여 등으로 규정해 버리면 그 의미가 명쾌해지기 때문이다. 경제적 소통을 이용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왜냐하면, 현대 사회에서 경제적 소통 만큼 효과적인 것은 드물며 인간 존엄성을 지켜줄 수 있는 많은 부분은 경제적 소통이 담당하고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다만 과학적 소통의 대부분이 현대 사회 경제적 소통 속에서 이루어질 때, 과연 과학을 하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 현재 과학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한가라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과학자가 시민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현대 사회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살펴보는 것이 출발점이다. 여기에서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혁신적인 과학기술이 나올 수 있는데, 한가지 예로, 에너지 문제와 세대를 초월해서 나타나고 있는 경제적 어려움을 들 수 있다.
에너지 문제는 석유, 전기 등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세계 기후변화 이슈, 국내 전기 생산과 연결된 사회 갈등을 포함하는 것이다. 경제적 소통이라는 패러다임 속에서 과학을 보는 것과 경제적 어려움 자체를 해결하기 위한 과학자의 마음은 엄연히 구별되어야 한다.
에너지 문제와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정치인도 노력하고 있고 시민단체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다만 과학자들은 한 발 더 깊숙이 나아가 에너지, 사회갈등, 경제적 어려움을 포괄하는 과학적 해결 방법은 없는지 스스로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이러한 고민하기 시작할 때, 과학적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다. 끝으로, 과학적 소통을 통한 사회문제 해결 노력 예를 하나 들기로 한다.
‘똥본위 화폐(FSM)’가 지구를 살릴 수 있다?
매년 12월 세계적인 인문학자, 예술가, 과학자들에게 edge.org의 편집자인 John Brockmann은 그 다음 해의 질문을 던진다. 2016년 질문은 “What is the most interesting scientific news?”이었다. 200여 명의 석학들은 각자의 의견을 보냈고 2016년 1월 1일 홈페이지(edge.org)를 통해 발표되었는데 곧 책으로도 출판된다. 여기에 필자는 똥본위화폐(Feces Standard Money, FSM)라는 주제로 글을 기고했다.
우리가 매일 누는 ‘똥(Feces)’을 수세식 화장실을 통해 하수처리장으로 보내지 않고, 위생적이고 과학적인 기술을 이용하여 분말로 만들 수 있는 변기를 만들 수 있다면 과학기술 혁신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분말로 만들어진 똥을 에너지로 만들어 주는 미생물 반응조에 음식물 쓰레기 분리 수거하듯 넣는다.
만들어진 에너지 생산량에 따라 새로운 화폐인 ‘돈(똥본위화폐 FSM)’을 받아, 마을버스, 온수, 난방, 음료수, 문화공연 등에 활용하는 과학경제가 edge.org에 기고된 FSM의 기본 아이디어다. 수세식 화장실 물을 아끼는 것 뿐만 아니라 하수처리장 건설, 운영비를 절감하고 에너지까지 만들어내는 과학기술인 셈이다. 이런 세상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화장실 변기기술(황금가전제품 산업), 에너지 생산장치 등의 최첨단 과학기술개발이 필요함은 물론, 일반 시민들과의 과학적 소통이 필수 요소이다.
단순히 지금과는 다른 변기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사회 시스템 속에서 무엇인가 기여한다는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새로운 과학적 소통인 것이다. 물론 여러 장벽이 있겠지만 FSM이 실현될 수 있다면, 과학기술이 본격적으로 우리 삶 속으로 들어오게 되고, 시민들은 스스로 선택한 행위가 과학이라는 이름 하에서 과학적 소통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개인의 행동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의 일부가 되고, 환경과 교류하면서 살아가도록 유도하는 것, 바로 이것이 과학적 소통을 통한 과학기술의 혁신이 아닌가 한다.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소통의 부재, 경제적 어려움 등 다양한 문제들은 우리가 사는 사회, 우리가 매일 쓰는 에너지, 자연, 그리고 인간을 연결하는 본질을 이해하는 과학자들의 소통 노력을 통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본 기사는 국가과학기술연구회에서 펴내는웹진, ‘nst 4번째 e야기’ 머릿기사로 소개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