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처 나노테크놀로지>는 나노 연구가라면 누구나 논문을 한 편이라도 싣고 싶어 하는 꿈의 학술지다. 그런데 2016년 7월호 한 권에 두 편의 논문을 실은 과학자가 있다. 바로 UNIST 자연과학부 바르토슈 그쥐보프스키(Bartosz Grzybowski) 교수다. 지난 2014년 한국에 와 연구자로서 삶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는 그를 만났다.
“폴란드는 한국과 비슷한 아픈 역사가 있습니다. 거기다 두 나라 사람 다 시끌벅적한 모임을 좋아하고 인정이 많죠.”
외모만 보면 딱 미국인인 그쥐보프스키 교수는 폴란드에서 태어난 폴란드 사람이다. 100년 가까이 주변 강대국인 독일과 러시아의 식민지 지배를 받은 폴란드는 독립한 뒤에도 구소련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 1991년 구소련이 해체하면서 폴란드의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자본주의로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된다. 그쥐보프스키 교수가 고등학교를 마치고 미국 유학을 떠날 무렵의 상황이었다.
“어릴 때부터 수학을 좋아했습니다. 고등학생 때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서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요.”
그쥐보프스키 교수는 모든 영역이 과도기에 들어간 조국을 뒤로 하고 1991년 미국으로 건너와 예일대 화학과에서 학부를 마치고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뒤 노스웨스턴대 화학과에서 교수로 일하다 2014년, 24년의 미국 생활을 접고 UNIST로 온 것이다.
내심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도 했지만 막상 지내보니 미국에서 살 때보다 문화적 이질감이 덜해 오히려 더 편했다. 심신의 안정이 찾아와서일까? 최근 들어 그쥐보프스키 교수가 저명한 학술지에 논문을 싣는 주기가 짧아지고 있다.
화학으로 가업을 이은 그쥐보프스키 교수
문득 수학영재가 왜 화학을 전공으로 택했는지가 궁금해졌다.
“전 화학자 집안에서 태어났죠. 할머니와 부모님 모두 화학자입니다. 4대째 ‘가업’을 이은 셈이죠.”
수학자가 되지 못해 아쉽지 않느냐는 질문에 “전혀”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에게 수학은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이고, 따라서 모든 연구의 바탕에는 수학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찌 보면 그는 응용수학자이기도 하다. 화학합성을 설계할 수 있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게 그의 주요 연구주제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지난 봄 인공지능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이기고 바둑을 정복해 화제가 됐죠. 물론 대단한 일이지만 사실 바둑은 게임일 뿐입니다. 그에 비하면 컴퓨터에게 화학합성을 설계하는 능력을 가르치는 일은 훨씬 어려운 과제입니다.”
수학올림피아드로 시작된 이야기가 어느새 알파고까지 왔다. 기왕 이렇게 된 마당에 나노과학은 잠시 미루고 컴퓨터 화학자 연구에 대해 좀 더 들어봤다. 사실 주어진 출발물질에서 어떤 물질을 합성하고자 할 때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은 반세기 전에 이미 등장했다. 문제는 그 해결책이 합성 고수들에게는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것. 오래 전 바둑 게임이 나왔지만 알파고가 등장하기 전까지 프로기사들에게 아무런 자극이 안 된 것과 마찬가지다.
기존 프로그램들이 많은 가능성에서 최선의 수를 찾는 ‘계산력’에 주로 의존했다면 알파고는 머신러닝이라는 알고리듬을 통해 학습과 경험으로 스스로 실력을 쌓아 고수가 됐다. 지보브스키 교수 역시 머신러닝을 바탕으로 그래픽이론, 양자역학 등 다양한 수학과 물리학 논리를 적용해 화학의 알파고를 만들어왔다. 작년에는 학술지 <앙게반테 케미(Angewandte Chemie)>에 이 분야에 대한 34쪽짜리 리뷰 논문을 싣기도 했다.
“지금까지 제가 쓴 논문 200여 편 가운데 가장 긴 논문이었죠. 폴란드의 과학자들과 함께한 결과입니다.”
폴란드는 수학이나 물리학 같은 이론 분야가 강한 나라다. 그쥐보프스키 교수는 조국 폴란드의 과학자들과 이 분야에서 활발한 공동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오랜 연구 끝에 화학자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성능이 뛰어난 프로그램을 완성했고, 그 결과 최근 국내 한 화학회사가 그들이 고안한 프로그램을 구매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프로그램이 현장에서 적용되기 시작하면 미래에는 합성화학자가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 아닐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화학자들을 도와주는 동료죠. 화학자들은 프로그램이 제안하는 해결책을 보고 미처 생각지 못한 측면을 깨달을 수도 있고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알파고가 보여준 신의 한 수가 프로기사들이 바둑 포석을 연구하는 데 영감을 주는 것과 비슷하다는 말이다.
나노입자로 만든 짭짤한 회로와 시스템스 나노과학
대화의 주제가 <네이처 나노테크놀로지(Nature Nanotechnology)> 7월호 표지논문으로 실린 나노과학 연구로 옮겨졌다. 같은 호에 실린 해설의 제목이 ‘나노입자로 만든 짭짤한 회로’라는 점이 재미있다.
“다이오드나 트랜지스터 같은 전자소자는 다들 반도체로 만듭니다. 전자의 흐름을 제어해 신호를 내지요. 그런데 저희는 이온의 흐름으로 작동하는 다이오드를 구현했습니다.”
‘짭짤한 회로(salty circuits)’는 염(salt)을 이루는 성분인 이온으로 작동한다는 걸 뜻하는 재치 있는 표현인 셈이다. 그쥐보프스키 교수가 공식적으로 ‘화학전자 다이오드’라고 이름 붙인 이 소자의 아이디어는 놀랍게도 동물의 신경계에서 나왔다. 그는 나트륨이나 칼륨 같은 이온을 내놓거나 흡수해 신경신호를 주고받는 뉴런을 모방한다면 반도체를 쓰지 않고도 전자소자를 구현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연구를 시작했다.
“금이나 구리 같은 금속은 전자가 퍼져 있기 때문에 전자소자로 쓸 수 없습니다. 그런데 금을 나노입자로 만든 뒤 염 형태의 유기분자를 코팅하면 플러스(+) 또는 마이너스(-) 표면전하를 띠면서 반도체 같은 특성이 나타납니다.”
연구팀은 표면전하가 서로 반대인 나노입자소자를 교묘히 배치한 소자가 다이오드의 특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연구 결과가 표지논문으로 실릴 정도로 화제가 된 건 기존 반도체와는 달리 ‘축축한’ 조건에서도 작동하기 때문에 넓은 범위에 응용할 수 있어서다. 즉 상용화가 되면 습도 센서나 특정 화합물에 대한 센서로 쓰일 수 있고 심지어 용액 상태인 우리 몸 안에 집어넣는 장치에도 적용할 수도 있다는 뜻. 물론 이런 응용이 가능해지려면 더 작고 더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어야 하므로 앞으로 가야할 길은 멀다.
한편 같은 호에 실린 그쥐보프스키 교수의 또 다른 논문은 ‘생명체에서 영감을 얻은 시스템스의 나노과학’이라는 제목으로 최근 새로 떠오르는 분야를 조망하고 있다. 여기서 시스템스(systems)란 여러 구성성분들이 상호작용하고 정보를 교환하면서 새로운 기능을 창출하는 체계를 뜻한다. 그쥐보프스키 교수가 보기에 나노성분(생체분자)들이 연출하는 시스템스의 정수가 바로 생명체다. 이번에 개발한 화학전자소자는 가장 간단한 예인 셈이다. 그런데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 지금까지 소개한 논문들에서 우리나라 사람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과학에서는 실패가 일상, 성공이 예외
“그건 이 연구들이 제가 UNIST에 오기 전부터 진행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 연구자들의 이름이 실린 논문들을 쓰고 있고 저명한 학술지에 투고도 했습니다.”
현재 그쥐보프스키 교수는 UNIST에서 자기조립나노입자와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배터리에 대한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특히 배터리에 기대가 큰데 논문을 투고한 상태라 자세한 설명을 하기는 곤란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쥐보프스키 교수의 눈에 한국 학생들은 어떻게 비칠까.
“이곳에 와서 학생들이 다들 똑똑한 걸 보고 감탄했습니다. 이런 인재들과 일하게 돼서 너무 좋아요. 다만 한 가지 실패를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는 게 좀 문제이긴 합니다.”
그에 따르면 우리나라 고유의 교육체계 때문인지 한국 학생들은 틀리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는 막 연구팀에 합류한 학생들이 실험에 실패한 뒤 큰 잘못을 한 것처럼 낭패감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웠다고 한다.
“과학에서 실패는 당연한 겁니다. 그 경험을 통해 새로운 가설을 세우고 더 나은 실험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성공은 수많은 실패 끝에 어쩌다 찾아오는 선물과 같은 것이죠.”
성실하지만 소심한 우리나라 학생들은 이런 그쥐보프스키 교수의 말과 행동에 점차 틀을 깨면서 스스로 멋진 아이디어도 내고 이를 입증하는 실험도 구상하는 능력을 키우고 있다. 다들 기본기가 탄탄하다 보니 이런 변신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쥐보프스키 교수는 국내외 많은 연구자들과 공동으로 20여 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말 그대로 쉴 틈이 없다. 그래도 그의 표정은 연신 싱글벙글한다.
“매일 아침 7시에 집에서 논문을 씁니다. 연구실에 나와 실험을 챙기고 회의를 하다 보면 어느새 밤이 되죠.”
과거 그쥐보프스키 교수는 바쁜 일정의 상당 부분을 연구비를 획득하기 위한 제안서를 쓰는 데 보냈다. 게다가 어렵게 얻은 연구비라 할지라도 미국에서는 제안한 프로젝트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실험에만 써야 하기 때문에 여러모로 골치가 아팠다. 그런데 UNIST에 와서 기초과학연구원(IBS) 첨단연성물질연구단에 소속되면서 융통성 있게 연구비를 쓸 수 있게 되자 이런 스트레스가 없어졌다.
자유로운 연구비 사용 결과 그쥐보프스키 교수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바로바로 실험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연구자로서는 이상적인 환경이다. 그가 현재 자신이 과학자로서 삶의 전성기에 있다고 말하는 이유와도 같다. 그래도 너무 일만 하는 것 아니냐는 말에 그쥐보프스키 교수는 “과학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예술”이라며 뜻밖에도 공자의 말을 인용했다.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건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좋아하는 직업을 택하면 평생 하루도 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라는 공자의 말처럼 오늘도 그쥐보프스키 교수는 어김없이 UNIST로 향한다.
글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About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서울대 화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지내며 『강석기의 과학카페』,『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를 저술했으며, 옮긴 책으로는 『반물질』, 『가슴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