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독일의 프라운호퍼 화학기술연구소가 UNIST를 찾았다. 자동차 복합소재 기술 개발을 선도할 분원을 설립하기 위해서다. 아시아 지역을 담당할 독일 프라운호퍼 분원은 UNIST에 설립됐다. 울산의 주력산업인 자동차 생산기술을 더욱 발전시키고, 가볍고 단단한 자동차를 만들 부품 소재 개발도 가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기계 및 원자력공학부 박영빈 교수가 독일 프라운호퍼의 기술력이 대한민국 울산 UNIST에 도달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2011년 스위스 제네바 모터쇼에서 전시된 람보르기니 아벤타도르에 이목이 집중된 적이 있다. 일체형 탄소섬유 복합재가 차체에 적용된 이 차종은 프레임(차의 뼈대) 무게가 150kg도 채 되지 않는다. 대략 성인 남성 두 명의 무게와 맞먹는 셈이다. 이 덕분에 초경량 차량으로 주목받았다.
이후 자동차 경량화를 위한 탄소섬유 복합재 차체·부품 개발이 전 세계적으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대부분 완성차 업체들이 앞을 다퉈 기술 개발을 주도했다. 그러나 탄소섬유 복합재가 자동차 시장에 진입하는 건 말처럼 쉽지 않았다. 원료가 되는 소재 가격이 높아 경제성이 떨어지는데다 복합재 부품을 빠르게 만들 고속성형공정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세계 자동차 시장을 이끌 ‘복합재료 개발’
복합재료는 기본적으로 고분자 수지와 보강재로 구성된다. 이 중 보강재로 어떤 소재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복합재의 독특한 성질이 결정된다. 일반적으로 유리섬유가 산업용 복합재로 많이 사용된 것에 반해 최근에는 튼튼하고 가벼운 탄소섬유가 주목받고 있다.
일례로 현재 수송기기용으로 가장 보편적인 탄소섬유는 인장강도가 5~6GPa 정도 된다. 이는 단면적이1㎟인 탄소섬유에 무려 500~600kg의 무게를 매달아도 변형 또는 파손 없이 하중을 지탱한다는 의미다. 탄소섬유 복합재를 적게 써도 가볍고 튼튼한 수송기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자동차 산업은 재료가격 등에 민감해 고가의 탄소섬유 복합재를 사용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최근 탄소섬유가 국산화되고 수요가 급증하면서, 가격적인 문제는 점차 해소될 전망이다.
이에 반해 복합재 성형은 아직 난제로 남아 있다. 일반적인 복합재 제조는 섬유 직물이나 테이프를 적층한 후 고분자 수지를 섬유조직에 스며들게 하는 방식(함침)으로 이뤄진다. 이는 공정 특성상 금속 성형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따라서 높은 생산성이 요구되는 자동차 산업에 복합재를 적용하려면 금속 성형만큼 발달된 신(新)성형공정 개발이 필요하다.
새로운 성형공정이 개발돼도 금속 부품을 복합재로 대체하는 건 어렵다. 기존 부품과 동일한 성능과 기능을 갖도록 복합재 특성에 맞는 새로운 설계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복합재 설계와 고속성형, 두 분야는 우리나라가 해외 선진기술 보유국에 비해 뒤처진 상태다. 때문에 자동차 복합재 시장 진입을 위해 반드시 신속하게 확보해야 하는 기술이기도 하다.
빠르게 성장한 프라운호퍼 화학기술연구소
두 분야를 2010년도 초부터 집중적으로 연구·개발해온 해외우수 선도기관이 바로 독일 프라운호퍼 화학기술연구소(Fraunhofer Institute for Chemical Technology, ICT)다. 프라운호퍼는 독일 내 67개 연구소와 2만 3000여 명의 직원을 둔 독일의 대표적인 정부출연 연구기관이다. 유럽 내 최대 응용과학기술 연구기관으로 알려진 이곳은 막스플랑크, 헬름홀츠, 라이프니츠와 함께 독일 4대 연구소로 꼽히며, 실용연구를 강조하는 게 특징이다.
이곳의 화학기술연구소는 67개 프라운호퍼 연구소 중 규모가 4번째로 크며 1959년에 설립됐다. 프라운호퍼 화학기술연구소의 주력 연구개발은 에너지 및 환경소재, 화학 및 화학공정, 국방 및 보안, 자동차 및 수송기기 등 네 분야로 이뤄졌다. 특히 고분자 및 복합재료 분야에서 세계 최고수준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2013년 BMW에서 출시한 보급형 전기자동차 i3 모델에 사용 중인 탄소섬유 복합재의 고속성형기술이 이 연구소에서 개발되면서 자동차 경량화 분야를 선도하고 있다.
UNIST를 선택한 프라운호퍼
국내 자동차 업계는 가볍고 튼튼한 복합재를 자동차 차체·부품에 적용하려는 의지와 절박함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 필요한 기술은 전무했다. 이 부분의 필요성을 절감한 UNIST는 2014년 5월 처음으로 프라운호퍼 화학기술연구소 문을 두드렸다.
2014년 당시 프라운호퍼 화학기술연구소는 2012년에 캐나다 온타리오주에 제1분원을 설립한 뒤로 아시아 지역에 제2분원 설립 계획을 구상 중이었다. 독일 본원은 유럽 지역 허브로, 캐나다 분원은 북미 지역 허브로 활용하고 아시아 지역 허브를 설립해 3개 주요지역을 커버하는 ‘자동차용 복합재 기술 허브 트라이앵글’을 구성하려는 장기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물론 한국에 프라운호퍼 분원을 유치하고 설립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분원이 된다는 건 프라운호퍼 산하 기관으로 인정받고 프라운호퍼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는다는 걸 의미한다. 이 때문에 조건과 절차가 매우 까다롭고 복잡한 프라운호퍼 본부의 승인을 얻어야만 했다.
프라운호퍼 측은 분원 설립에 필요한 몇 가지 조건을 걸었다. 자동차 산업 기반이 있는 지역일 것, 지역 내 이공계 중심 대학 캠퍼스나 인근 지역에 설립할 것, 분원을 유치하는 대학이 협력연구에 대한 강한 의지가 있을 것, 중앙정부 및 지자체의 유치 의지와 지원이 있을 것이었다.
이 모든 조건을 완벽히 만족하는 곳이 바로 UNIST였다. 자동차 산업의 메카인 울산에 위치하고, 정부 및 지자체 지원을 통해 프라운호퍼와 공동연구·개발을 수행하는 것에 대해 강한 의지와 역량이 있는 UNIST가 아시아 지역 분원의 적임지였던 것이다.
UNIST에서는 자동차용 복합재 기술 문제를 해결하는 연구에 집중할 예정이다. 특히 복합재 부품을 3분 내로 생산할 수 있는 고속성형 기술, 복합재와 금속을 접합하는 이종소재 접합기술, 차량 경량화율을 극대화할 수 있는 복합재 설계 기술, 복합재 제조 후 남는 소재를 재활용하는 기술 등을 중점적으로 연구할 계획이다.
한국 분원이 개발한 독자기술은 복합재 기반 초경량 자동차를 양산하는 데 기여할 뿐만 아니라 구조 경량화가 필요한 다른 분야에 적용될 것이다. 가볍고 튼튼한 미래형 자동차가 UNIST에서 만들어질 날이 머지않았다.
글_박영빈 기계 및 원자력공학부 교수
박영빈 교수는 복합재료 및 나노복합재료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스마트 응용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탄소섬유와 탄소나노소재를 이용해 실시간으로 구조가 건강한지 살필 수 있는 연구를 활발하게 수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독일 프라운호퍼 ICT 한국분원 설립을 통해 자동차 구조용 경량 복합재의 첨단성형 및 설계 기술을 공동연구·개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