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박 잊고 불을 켜놓고 외출해도 터치 한 번으로 집안일을 조종할 수 있고 건강 진단은 물론 걸릴 가능성이 높은 병까지 찾아서 예방해주는 시대. 우리에게 언제부터 이렇게 똑똑한 시대가 온 걸까. 무엇이 이렇게 스마트한 삶을 가능하게 한 것일까. 그 해답을 UNIST 슈퍼컴퓨팅센터에서 찾아본다.
#1. 출장이나 여행을 위해 해외로 나가는 게 낯설지 않은 세상이다. 우리나라와 다른 기후를 가진 장소에 갈 때면 현지 기후에 맞는 옷을 챙기기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다행히도 요즘은 스마트폰이라는 편리한 도구가 있다. 날씨 어플리케이션(이하 앱)을 실행하면 얼마든지 현지 기후에 맞는 스타일을 추구할 수 있다.
일상으로 스며든 슈퍼컴퓨터
컴퓨팅 기술은 우리 일상 속에 아주 깊숙이 들어와 있다. 단지 우리가 눈치를 채지 못할 뿐이다. 아니,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일반화됐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위에서 예를 든 상황도 마찬가지다.
스마트폰 날씨 앱은 작동하는 순간 인터넷으로 커다란 서버에 접근해 날씨 정보를 가져온다. 이 정보는 기상청에있는 슈퍼컴퓨터가 제공한다. 사람 두뇌 역할을 하는 CPU가 수만에서 수십만 개 장착된 슈퍼컴퓨터는 1~2시간 후의 날씨 예보인 초단기 예보부터 수일~수개월 후의 중장기 예보를 한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기상관측장치에서 수집된 데이터를 우리나라의 기후 모델에 입력하고, 슈퍼컴퓨터를 이용해 시뮬레이션을 실시한 결과가 일기예보다. 밤에 잠들기 전에 내일 아침 기온을 미리 확인하는 사소한 일상이 가능한 것도 슈퍼컴퓨터 덕분이다.
#2. 11월 11일, 우리나라에서 빼빼로데이로 불리는 날이다. 지인끼리 초코 막대과자를 주고받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을 때, 우리와 가까운 중국의 컴퓨터 앞에서는 쉼 없이 움직이는 경쾌한 마우스 소리가 났다. 중국기업 알리바바가 장군절을 맞아 중국판 온라인 블랙프라이데이 쇼핑행사를 개최했기 때문이다.
2015년 11월 11일 하루 동안 알라바바는 912억 위안(한화 16조 5천억 원)어치 물건을 팔아치웠다. 중국뿐 아니라 세계 곳곳의 수많은 사람들이 온라인으로 물건을 구매하기 위해 바삐 움직인 하루였다. 단 72초 만에 10억 위안(한화 1813억 원)을 팔아버릴 정도로 온라인 접속이 엄청났지만 쇼핑 사이트는 다운되지 않았다.
알리바바라는 중국 기업은 장군절 쇼핑이벤트를 100% 온라인으로 진행했다. 16조 원이 넘는 매출액을 달성할 수 있었던 건 데이터 처리 프로그램의 성과이기도 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평소 수백 배에 달하는 14억 3천만 건의 접속이 아무런 장애 없이 처리됐다.
이는 알리바바가 대규모의 데이터센터를 건설하고 온라인 쇼핑을 처리하는 데 최적화된 자체 프로그램을 개발한 덕분이다. 수십만 개의 CPU를 가진 슈퍼컴퓨터와 최적화된 프로그램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따뜻한 집에서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쇼핑할 기회를 누린 것이다.
슈퍼컴퓨터는 이미 우리 일상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물론 과학기술 분야에서는 훨씬 오래전부터 슈퍼컴퓨터를 활용하고 있다. 기술이 점점 복잡해지고 서로 다른 분야가 융합해 규모가 커지면서 그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현대의 연구현장에서 슈퍼컴퓨터는 절대 빠질 수 없는 든든한 연구 지원군이다.
슈퍼컴퓨터, 연구 사각지대 없애다
슈퍼컴퓨터는 연구 대상이 너무 작거나 커서, 혹은 위험해서 아니면 너무 복잡해서 등의 이유로 직접 실험이 불가능한 연구를 가능케 한다. 예를 들면 주기율표에 나오는 원소들이 서로 반응할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시뮬레이션을 진행하는 게 가능하다. 이 결과는 물질 합성의 효율을 높이는 촉매를 개발하는 데 유용하게 쓰인다.
우주 기원을 밝히는 암흑물질 시뮬레이션과 생명체의 유전자 정보를 분석하는 게놈 연구에도 슈퍼컴퓨터가 쓰인다. 특히 한 생명체를 이루는 수많은 유전정보를 분석하는 일은 슈퍼컴퓨터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이런 분석결과는 유전자 특성에 맞는 맞춤 치료제와 난치병 치료제 개발에 활용된다.
산업체의 기술 개발에도 슈퍼컴퓨터의 역할은 크다. 자동차만 해도 그렇다. 우리가 매일 타는 자동차는 동력을 만드는 엔진, 이를 통제하는 각종 전자장치, 탑승자를 보호하는 프레임, 안전한 주행을 위한 타이어 등으로 이뤄진다. 연비가 좋고 친환경적 엔진을 개발하려면 연소 과정을 분석하고, 각종 충돌에 따른 구조적 안전 등 수많은 경우의 수를 따져야 한다. 이런 복잡한 계산을 인간이 직접 수행하는 건 불가능하다. 따라서 세계 유수의 자동차 회사는슈퍼컴퓨터를 이용해 가상의 자동차 모델을 만들고 시뮬레이션을 통해 최적화된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자동차 산업 이외에도 중공업, 석유화학, 기계부품 소재, 의료공학 등 슈퍼컴퓨터가 사용되는 분야는 셀 수 없이 많다. 오히려 슈퍼컴퓨터가 쓰이지 않는 분야를 찾는 게 쉬울 정도다.
UNIST, 슈퍼컴퓨터 성장기반 만든다
슈퍼컴퓨팅 기술은 흡사 은하계 탐험을 위해 쏘아 올리는 우주선과 같다. 인류가 가진 모든 지식을 총동원해 만드는 우주선처럼 슈퍼컴퓨터도 최첨단 과학기술이 모여 완성된다.
컴퓨터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은 물론, 컴퓨터끼리 연결해 초고속으로 데이터를 주고받을 수 있는 ‘네트워크 통신기술’, 엄청난 양의 계산 데이터를 내・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저장기술’, 계산된 결과를 편리하게 보여줄 수 있는 ‘시각화기술’ 등이 슈퍼컴퓨터로 이룩한 ‘과학기술의 총아’인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슈퍼컴퓨터는 국가 과학기술개발은 물론 우리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슈퍼컴퓨터의 중요성은 잘 알려진 편이다. 하지만 이 분야를 이끌어나갈 인재는 턱없이 부족한 현실이다. 이에 UNIST는 2010년 슈퍼컴퓨팅센터를 설립했다. 첨단 연구를 지원하는 임무 외에도 미래 슈퍼컴퓨팅 기술을 이끌어갈 인재를 양성하고, 산・학・연 연구개발 협력을 추진하려는 목적이다.
이후 UNIST 슈퍼컴퓨팅센터는 학내・외 연구자를 지원하며 현재까지 세계 유수의 학술지에 100여 편 이상의 논문을 게재하는 성과를 이뤄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장차 슈퍼컴퓨팅을 이끌어나갈 미래 세대를 키워내는 데 힘쓰고 있다. 인재를 길러내는 게 슈퍼컴퓨팅 분야를 육성하는 것이고, 나아가 국가의 과학기술 발전에 이바지하는 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매년 방학을 이용해 열고 있는 슈퍼컴퓨팅 계절학교에서는 슈퍼컴퓨터 활용과 프로그래밍 교육을 진행한다. 또 전국의 대학생과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국가슈퍼컴퓨팅 경진대회를 개최해 우수한 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데도 기여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슈퍼컴퓨팅 수준을 세계무대에서 뽐내는 성과도 있었다. 2013년과 2014년에는 아시아 슈퍼컴퓨팅 경진대회에 참가해 최종 결선에 진출했다. 특히 2014년에는 세계 슈퍼컴퓨팅 경진대회 결선에도 올라 UNIST는 물론 한국의 이름을 알렸다. 이런 경진대회에 참여한 학생들은 진학한 학교와 취업한 기업에서 뛰어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2015년은 UNIST 슈퍼컴퓨팅센터에 특별한 해였다. 전국 7개 과학영재고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청소년 캠프’를 개최했기 때문이다. 슈퍼컴퓨팅 우수인재 발굴과 대중화를 목적으로 추진된 이 캠프에는 63명의 과학영재가 참가해 직접 PC를 연결하고 소형 슈퍼컴퓨터를 만들었다.
또 직접 만든 슈퍼컴퓨터를 이용하여 과학계산도 실시했다. 학생들의 수준은 생각보다 높았고, 프로그램을 즐기는 동안 슈퍼컴퓨터와도 친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이 행사는 슈퍼컴퓨터 대중화 측면에서도 의미있고 보람된 성과였다.
슈퍼컴퓨팅, 어렵지 않아요
슈퍼컴퓨팅 전문가라 하면 흔히 컴퓨터공학 전공자를 떠올린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실례로 국가슈퍼컴퓨팅센터에서 컴퓨터공학 전공자는 의외로 적은 비중을 차지한다. 대신 물리, 화학, 기계공학 등 슈퍼컴퓨터를 직접 활용하는 분야의 전공자들이 더 많다.
연구를 하기 위해 슈퍼컴퓨터가 필요한 연구자가 슈퍼컴퓨터라는 우물을 파다 보니 어느새 우물 파는 장인이 된 것이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컴퓨터공학 전공자의 도움을 많이 받았겠지만 말이다.
슈퍼컴퓨터 전문가가 되려고 지금 하는 걸 중단하고 컴퓨터공학에 뛰어들 필요는 없다. 현재 전공과목을 열심히 공부하고 슈퍼컴퓨터를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다 보면 어느새 슈퍼컴퓨터 전문가가 되어 있을 것이다.
UNIST 슈퍼컴퓨팅센터에서는 이곳을 거친 많은 인재들이 미래에 슈퍼컴퓨터를 활용해 과학기술 개발이나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을 보며 혼잣말로 이렇게 외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그래, 이게 다 ‘슈퍼컴퓨터’ 덕분이네.”
글_ UNIST 슈퍼컴퓨팅센터 이순희 팀원
ABOUT UNIST Supercomputing Center
UNIST 슈퍼컴퓨팅센터는 미래 국가 경쟁력을 좌우할 핵심기술인 슈퍼컴퓨팅 활용기술을 구축해 첨단과학기술연구를 선도하고 연구 중심 대학으로 나아가고자 설립됐다. 상시적이고 체계적인 교육 훈련과 기술지원을 통해 공학해석 및 슈퍼컴퓨팅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UNIST와 울산지역의 연구역량 강화에도 기여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시스템 운영 및 기술개발, 교육 및 경진대회, 청소년캠프 기획, 지역중소기업 및 소규모 연구소 지원을 주력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다. UNIST 슈퍼컴퓨팅센터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HPC(high performance computing) system은 UNIST 구성원 누구나 계정 발급이 가능하다. 또 슈퍼컴퓨터 사용 계정 신청서 및 연구계획요약서 작성을 통해 사용자 신청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