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분야에 10년 이상 몰두하면 전문가가 되고, 20년 이상 몰두하면 장인이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올해로 과학자의 길을 걸은 지 만 30년이 되는 김광수 교수는 어떨까? 원자에서 분자로, 그리고 분자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삼라만상과 인간의 인지에 관한 근원을 탐구하는 국가대표 과학자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연구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한 쪽을 어느 정도 공부해도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새로운 출발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과학계에선 두 분야를 섭렵하기도 힘들다. 그런데 화학에서 물리학으로, 다시 화학으로, 그리고 또 다른 분야인 생명과학으로 쉼 없이 넘나들며 연구한 과학자가 있다. 바로 UNIST 자연과학부 김광수 교수다.
“일부러 그러려던 건 아니었어요.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죠. 제 첫 번째 전공은 응용화학이었어요. 하지만 물리학에 대한 흥미를 놓지 못해 원자력까지 공부하다가 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다시 화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대학 강단에 서서는 수학, 전자공학, 물리학 등을 강의하기 시작했습니다.”
김 교수가 첫 번째 전공으로 화학을 선택한 배경에는 당시 한국의 경제상황이 있다. 1960년대는 한국 비료 산업의 부흥기였다. 이와 맞물려 화학 분야 연구가 활발해지기 시작하며 석유화학 등 화학공학이 발전했다. 이런 환경에 영향을 받아 김 교수도 대학교 첫 전공을 응용화학으로 선택했다. 하지만 그는 우주의 근원 등 물리 분야에 대한 갈망을 놓지 못했고, 결국 다시 물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우주의 근원이 뭔지 궁금했어요. 그래서 물리학 중에서도 가장 기본인 소립자 이론을 연구했죠. 소립자가 물질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이니까 우주에서도 단연 최소 단위일 거라 생각했어요.”
우주를 탐구하다 인간 본질에 대한 연구로
“소립자 연구를 계속 하다가 문득 ‘사람이란 무엇인가’, ‘생각이란 뭔가’ 하는 의문이 들더군요.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떻게 컵을 컵이라 인지하고, 사진 속에 담긴 울산을 어떻게 울산이라고 깨닫게 되는지에 대해서요. 철학자라면 그 답을 철학에서 구하고 역사학자라면 역사에서 궁리했겠지만, 저는 과학자기 때문에 그 질문을 과학으로 연구해야 했죠.”
인간을 이해하려면 자연 상태로 존재할 수 있는 순수한 물체의 최소 단위인 분자를 이해하는 일이 선행돼야 했다. 분자를 파악하려면 다시 화학을 이용해야 했다. 우주의 근원부터 인간 존재까지 연결하는 고리가 바로 화학이었다. 상황에 이끌려 선택했던 전공이 그의 궁금증을 해결해주는 열쇠가 된 것이다.
“분자 구조를 바탕으로 화학반응의 원리를 연구하면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는지도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화학적 반응을 통해 생각하는지를 알게 된다면요. 예를 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고양이를 보면 고양이라고 인식하고 맛있는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잖아요? 이러한 단순한 인식은 사실 우리 내부의 화학적 반응을 토대로 일어나거든요.”
김 교수는 분자의 반응이 어떻게 사람의 인식까지 이어지는지 연구하고자 여러 분자를 다루는 집합 시스템을 공부하게 됐다. 물리학에 기반을 둔 양자화학 분야다. 그는 양자화학 중에서도 원자에서 분자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분자끼리는 어떻게 작용하는지 등을 살피는 분자의 상호작용을 연구했다.
세계 최초로 나노 과학을 시작하다
김 교수가 맨눈에 보이지 않은 분자를 관찰하기 시작할 때만 해도 세계적으로 ‘나노(nano)’라는 단어가 낯설었다. 나노는 10억 분의 1m 수준의 미시적인 세계를 일컫는데, 당시에는 이런 개념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사정이 이러하니 나노 세계를 관측할 만한 실험장비도 마련되지 않았다.
관측할 수 없는 세상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남다른 상상력이 필요했다. 김 교수는 박사 후 연구원으로 IBM에서 분자 모델링을 하며 DNA 구조를 조사했다. 분자는 원자들 간의 공유결합(covalent bond)으로 이뤄진다. DNA는 여러 분자들이 자기조립(self-assembly)을 통해 나선형(helical)으로 감아 올라가는데 그 이유를 찾으려 한 것이다.
1986년, DNA 구조를 찬찬히 살피던 그는 물 분자가 여섯 개 모인 구조를 정확하게 예측하게 된다. 기존에는 물 분자가 여섯 개 모이면 육각형을 이룰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 교수는 사각형들이 새장(cage) 형태로 꼬인 구조라고 밝혔다. 이 형태가 물 분자를 더 안정적인 상태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예측은 10년 후, 전 세계 과학자들의 실험을 통해 증명됐다.
눈으로 관측하기 어려웠던 현상을 알아맞힌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 김 교수는 그 원동력을 서로 다른 분야를 넘나들며 공부했던 자신의 이력에서 찾았다. 물리학적인 접근으로 분자의 구조를 상상하고 예측하려는 시도가 맞아 떨어진 것이다.
“그동안 정말 여러 가지를 공부하면서 어떤 것은 깊게, 또 다른 것은 폭넓게 연구해왔습니다. 당장은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참고 견디며 무언가를 꾸준히 하다보면 무엇이 중요하고 그렇지 않은지 감이 생기게 돼요. 이런 감을 기반으로 여러 영역을 넘나들며 새로운 시도를 해봤어요. 물리학에서 익숙한 것을 화학에 적용하게 되면 새로운 방법이 되죠.”
요즘 김 교수는 UNIST 생명과학부 교수들과의 나노 과학을 생명과학에 응용하는 연구를 시작했다. 사람의 뼈를 치료하거나 새로운 단일 세포를 측정하는 연구가 여기에 포함된다. 또 전기전자컴퓨터공학부와 협업해서 인공지능을 이용한 분자 디자인도 시도해보려고 한다. 인공지능에 연구방법을 학습시키면 새로운 분자 구조를 설계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는 모두 20년 전부터 품고 있었던 질문인 ‘사람은 어떻게 사고하는가?’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업들이다.
다르게 생각하면 다르게 보인다
“저는 생각하기를 좋아해요. 일부러 의식적으로 생각하기보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더군요. 그래서 퇴근길 버스를 탈 때마다 늘 내릴 정류장을 지나치고 말아요. 앉아 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다른 생각에 빠져들어 있거든요. 학생 때 시험공부를 하다가도 교재 내용을 머릿속에 입력하면 될 것을 늘 교과서를 보며 ‘이게 맞는 건가?’, ‘어떻게 이렇게 되지?’ 고민하다가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어요.”
눈앞에 닥친 연구 과제를 해결하다가도 늘 샛길로 빠지며 30여 년을 보내는 동안, 교단에 서며 무수히 많은 학생들을 만나본 결과 김 교수는 ‘연구 능력’과 ‘성적’이 꼭 비례하는 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성적이 뛰어난 학생이 연구 능력이 좋을 때도 있겠죠. 그렇다고 연구 성과와 성적이 늘 비례하는 건 아니에요. 가끔 학점이 3.0 이하인 친구들이 연구실에서 존재감을 드러낼 때가 있죠. 그들의 특징은 뭘 하나 잡았다 하면 절대 안 놓친다는 거예요. 그런 친구들이 결국 성공하는 걸 저는 목격했어요. 남들이 보기에 별 의미 없고 희망 없는 연구 같지만 그래도 악착 같이 물고 늘어진다는 건 자기 나름대로의 희망이 보인다는 뜻이거든요.”
일반적으로 성적이 뛰어난 학생은 올바른 길로 성실히 걸어왔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자주 딴 길로 새느라 성적이 뒤처진 학생도 있다. 김 교수는 딴 길로 새던 학생이 연구의 한복판에서 한눈을 팔았다면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한다. 그 딴 길에서 아무도 생각지 못한 보물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국가과학자로 UNIST 기초과학의 초석 다지다
UNIST 자연과학부는 연구와 교육, 어느 분야도 놓치지 않고 뚝심으로 이뤄온 김 교수가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무영 총장이 2009년 UNIST로 부임하기 직전에 포항공대 캠퍼스에서 마주친 적이 있어요. 그 때 ‘먼저 가서 좋은 학교 만든 후 저도 데려가라’고 우스갯소리를 건넸죠. 그런데 정 총장이 이 이야기를 잊지 않고 저를 찾아왔더라고요.”
당시 UNIST는 국내외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었지만 신생 학교로서의 한계가 있었다. 그는 정 총장에게 “기초과학 없이 학교의 가치를 올릴 수는 없는 일”이라며 “물리학, 화학, 수학과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정 총장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 자연과학부 설립에 착수해 지금의 모습을 꾸리게 됐다.
김 교수의 UNIST행은 세계적 석학, 로드니 루오프 교수와 스티브 그래닉 교수가 UNIST를 선택하는 중요한 기준점이 됐다. 이처럼 큰 역할을 했지만 그는 언제나 신중하고 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는다.
“에베레스트 산은 단지 산봉우리 하나만 높아서 이뤄진 게 아닙니다. 높은 봉우리들을 이어주고 받쳐주는 산맥들이 있기에 세계 최고봉이라는 명예를 얻을 수 있었던 거죠. 과학은 물론 UNIST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 최고가 되려면 바로 탄탄한 산맥이 필요해요. 젊은 연구자들을 도와주며 같이 가다 보면 어느새 함께 정상에 다다를 수 있게 되겠죠.”
국가과학자 제도란?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 성과를 내는 국내외 한국인 과학자를 선정해 연간 15억 원씩 최대 10년간 안정적으로 연구비를 지원하는 제도다. 연구비 지원 이외에도 후원회 결성 등 연구 환경과 각종 경제・사회적 지위를 보장받게 된다.
국가과학자 사업은 세계적 수준의 독창적인 연구 성과를 창출한 선도연구자를 발굴, 연구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정부 최고의 기초연구 지원프로그램이다. 국가과학자로 선정되려면, 국내외 한국인 또는 한국계 과학기술인이어야 한다. 또 기초 연구나 실용화 연구 분야에서 연구 우수성이 인정된 세계 최고의 과학기술인이거나 세계적인 연구업적을 올리고 국가경제와 과학기술 발전에 크게 기대되는 과학기술인이어야 한다.
김광수 교수는 2010년 국가과학자에 선정됐다. 김 교수는 자기 조립된 나노렌즈를 세계 최초로 개발해 이론적 광학 회절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나노 광학 현상을 발견해 이를 네이처에 게재하며 화제를 모았다. 또 그래핀 나노리본 스핀밸브 소자를 설계해 ‘슈퍼거대자기저항’이라는 새로운 물리현상을 예측하고, 그래핀을 이용한 초고속 유전자 해독 방법을 제시하는 등 나노과학 분야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