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12일 규모 5.8의 강진이 한반도를 강타했다. 그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10월 4일 태풍 ‘차바’가 남부지방을 휩쓸었다. 연일 터지는 대형 재난 앞에 시민들의 불안은 커져만 갔다. 하지만 우리 곁에는 재난에 대비한 과학기술이 있다. 주목받지 못해도 묵묵하게 연구해온 안전 전문가들에게 한반도 안전에 대해 물었다.
9월 12일 오후 8시, 경북 경주에서 기상청 관측 사상 최대 규모의 지진이 발생했다. 이후 지진 안전지대라고 믿었던 한반도에 490여 회의 여진이 이어지고 있었다. 불안이 채 가시기 전에 태풍 ‘차바’가 부산과 울산 일대를 쓸고 지나가면서 대한민국 안전에 비상등이 켜졌다.
이렇게 큰 재난이 눈앞에 닥치기 전까지 안전의 중요성을 실감하기 어렵다. 그래서 안전 문제에 대해서는 늘 의견이 갈린다. 안전은 무시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안이라는 점에는 대체로 공감하지만, 안 올지도 모를 재난을 예방하기 위해 공적 자금을 투입해야 한다면 다른 생각도 나온다. 당장 눈앞의 경제나 교육 문제가 더 급하다고 보는 시각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그동안 안전을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을까? 급작스러운 재난에 우리는 얼마나 잘 대처할 수 있을까? 재난의 위험을 피부로 느낀 2016년 가을. 우리 앞에 다가온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UNIST를 찾았다. UNIST의 재난 안전 연구자들은 대한민국의 안전 시스템을 진단하고 보완할 점은 없는지 꼼꼼히 짚어줬다.
일상 뒤흔든 경주 지진을 복기하다
“내진 측면에서 봤을 때 강진은 아니었어요. 일본이나 샌프란시스코, 미국 서부 해안 쪽 일명 ‘불의 고리’라고 불리는 지역과 같은 규모라고 할 수는 없죠. 지진을 겪어본 적이 없었던 터라 파급력이 크게 다가온 것으로 보입니다.”
도시환경공학부의 이영주 교수는 이번 지진 상황을 냉정한 시선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운을 띄웠다. 자주 경험할 수 없는 일을 겪은 터라 당황할 수는 있겠지만 실제로 이번 재난의 결과를 정확히 진단해봐야 대비도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이번 경주 지진의 피해는 주로 내진설계가 미비한 가옥에서 기왓장이 깨지거나 액자가 떨어지고 창문이 깨지는 등 비구조물의 파괴로 보고됐어요. 결론적으로 현재 내진설계가 적용된 구조물들은 이번 지진에 잘 견딘 셈이죠. 기존 내진설계가 비교적 잘 운영됐다고 판단할 수 있어요.”
이영주 교수의 전공은 토목공학 중에서도 구조공학이다. 그는 지진 등의 재난 발생 시 건축물 안전성을 확률적으로 나타내는 ‘구조신뢰성’을 연구하고 있다. 구조신뢰성은 건축물이 무너질 확률을 정량적으로 평가하는 방법론이다. 구조물의 안전성 평가는 재난 시나리오를 시뮬레이션으로 돌려보면서 결론을 얻는다. 이를 통해 개별 구조물의 위험성을 평가하거나 CAT(재난) 모델링으로 재난 피해를 예측하는 것이다. 구조신뢰성을 평가하는 방법은 재난에 따라 다른데, 지진의 경우는 내진해석이 이용된다.
이영주 교수는 이번 지진의 피해 상황을 구조재와 비구조재로 나눠 살폈다. 그 결과 건물의 중요한 구조물에 문제가 생기거나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이 교수는 “이번 지진의 피해가 조금 부풀려진 점은 있지만 그 덕분에 안전을 돌아볼 수 있었다”며 “우리나라에도 비교적 큰 규모의 지진이 발생한 만큼 내진설계 기준이 강화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어떤 재난에도 ‘안전한 원전’을 위해
뜻밖의 재난에 속수무책이었던 시민들은 2011년 이웃나라 일본에서 발생했던 동일본 대지진을 떠올렸다. 경주와 울산 지역에 원자력발전소(이하 원전)가 밀집돼 있다는 사실이 공포감을 키웠다. 대한민국 원전 안정성을 진단하기 위해 기계 및 원자력공학부의 이승준 교수를 찾았다. 이승준 교수는 국내에서 몇 안 되는 원전 안전 전문가로 꼽힌다.
“국내에서 내진설계가 제일 잘 된 건물이 바로 원전입니다. 만년에 한 번 일어날지 모를 지진까지 고려한 데다, 안전한 범위보다 넉넉한 ‘안전여유도’까지 포함해 설계하기 때문이죠. 원전 사고는 쉽게 일어나지 않지만 한 번이라도 발생하면 영향이 매우 커요. 그러니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사건에 대해 엄격하고 보수적으로 평가해 꼼꼼하게 설계하고 있습니다.”
원전 사고의 위험을 정확히 예측하려면 발생 가능한 모든 내부 사건과 지진, 지진해일(쓰나미), 태풍, 항공기 충돌과 같은 외부 사건에 대한 안전성 평가가 수행돼야 한다. 각 사건에 따른 시나리오를 분석하는 과정을 통해 발생할 위험에 대한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다.
“최근 원전에 디지털 기술이 적용되면서 기존 발전소에선 쓰이지 않는 소프트웨어가 도입됐어요. 원전 자가진단 등의 기능이 들어가 원전의 안전성이 높아진 겁니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정 규모 이상의 지진이 감지되면 자동으로 멈추게 하는 등 다양한 조치들이 수행되고 있습니다.”
현재 원전 내진 설계는 0.2g(약 규모 6.5 지진)에서 최근 0.3g(약 규모 7.0 지진)로 강화됐다. 여기서 단위 g는 지진 발생 시 특정지점이 받는 중력가속도를 뜻한다. 특히 동일본 대지진 이후 원전 안전 연구는 여러 대를 평가하는 방식으로 변하고 있다. 원전 한 호기씩이 아니라 여러 기의 원전을 함께 평가하는 것이다. 재난이 발생하면 같은 공간에 있는 원전이 동시에 영향을 받게 마련이고, 이것이 복합재난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 때문에 일어난 변화다.
이승준 교수 역시 이런 흐름에 동의하며 ‘원전 자동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교수는 “원전 사고는 대부분 사람의 실수로 일어난다”며 “자가 진단 시스템 등을 발전시켜 원전 자동화가 이뤄진다면 더욱 안전한 원전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뭉쳐서 나타나는 ‘복합재난’에 대응하자
원전 안전성 평가의 흐름이 변한 건 재난이 개별 단위로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가 복잡해진 만큼 재난도 지진과 태풍, 해일, 방사능 누출 등이 복합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도시환경공학부의 정지범 교수가 재난 관리의 영역에서도 ‘전재해적 접근(all aproach hazard)’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유다.
“앞으로는 한 가지 재난이 다른 부분으로 이어지는 ‘복합재난’이 많아질 겁니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대표적이죠. 처음엔 지진이 발생했고, 그 영향으로 해일이 일어났습니다. 지진해일 때문에 원전 시스템을 폐쇄시켰지만, 전기가 끊겼죠. 결국 냉각기를 가동하지 못해 원자로가 녹으면서 방사능 유출까지 이어진 겁니다.”
이런 일이 우리나라에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특히 자동차 공장과 석유화학공단, 원전이 있는 울산은 복합재난 발생 위험도가 높다. 이런 위험에 대응하기 위해 UNIST는 복합재난관리연구소를 개설하고, 소장으로 정지범 교수를 초빙했다. 이곳에서 복합재난 상황을 가상으로 살펴보고 대응하기 위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다.
“예를 들어 화학공장의 내진설계가 버티지 못하는 지진이 발생할 경우를 가정합니다. 그러면 배관에 문제가 생기고, 화학물질이 누출될 수 있겠죠. 이런 상황에 대응하는 기술을 UNIST에서 개발하는 겁니다. 우선 드론에 탑재된 센서로 화학물질을 탐지하고, 이 정보를 대기모델링 연구자에게 전달해 확산 방향을 파악합니다. 그런 다음 도시계획 연구자가 거주 패턴과 인구분포, 교통 시스템을 바탕으로 대피방법을 제안하는 거죠.”
정 교수는 재난 전반을 관리하는 분야의 대가다. 그는 미리 재난 시나리오를 짜고 대비하면 인명이나 재산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본다. 여기에 한 가지 더 필요한 것은 사람들의 안전의식이다. 그는 “안전에 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고 그것을 실행하기 위한 정책이 필요하다”며 “재난에 대응한 기술뿐 아니라 사회적인 인식을 개선하는 분야도 함께 진행돼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현재 UNIST에서 연구하고 있는 가상의 재난 시나리오는 가능하면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이야기다. 하지만 안전 연구에서는 일말의 가능성에도 철저하게 대비해야 한다. 이에 UNIST의 연구자들은 각종 분야에서 지진과 태풍, 홍수, 화재, 화학물질 누출 등에 대비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 결과들은 혹시 모를 위험에서 대한민국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튼튼한 버팀목이 돼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