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부산시 영도라는 섬에서 자랐다. 아주 어렸을 때, 무서운 소리를 듣고 공포에 떤 적이 있었다. 그것은 “고래 고기 사이소.” 라고 외치는 아줌마의 목소리였다. 새벽에 가끔 들리는 그 소리의 뜻을 몰랐기 때문에 소름이 끼쳤다. 그 이른 시간에 듣기에는 말 자체가매우 이상한 데다 아줌마의 목소리도 한 맺힌 듯 슬펐다. 1970년대 부산 영도는 그렇게, 자식들 먹여 살릴 고래 고기를 이고, 이른 새벽 판잣집 골목을 도는 곳이었다. 그것이 필자가 고래를 처음 알게 된 계기다.
당시는 고래가 많아서 고래 고기도 많았다. 필자는 고래 고기를 안 먹는다. 인간에게 잡아먹히는 거대한 동물을 생각하면 슬프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연구를 핑계로 매년 수백 마리의 고래를 죽이는 인간들의 위선도 마찬가지로 슬프다. 일본 사람들은 정작 고래가 가진 모든 유전자 정보를 밝히는 고래의 게놈 연구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게놈은 한 생물이 가지는 모든 유전자 정보의 총합을 말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고래에 대한 게놈 논문을 세상에 처음 발표한 건 고래사냥을 금지한 한국 사람들이었다. 이 논문은 고래가 바다 속에서 어떻게 다이빙하는지, 장수하는 비결은 무엇인지, 암에 잘 안 걸리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게놈 정보를 제공한다. 한마디로, ‘고래 팔자’는 고래 게놈에 의해 결정되는 셈이다.
울산은 부산과 더불어 전 세계에서 고래가 가장 많이 살던 곳이다. 울산의 반구대암각화에도 나타나 있듯이, 한국 사람은 고래와 오랜 기간 인연을 맺어왔다. 그래서인지 세계 최초의 고래 게놈 논문에는 울산에서 잡힌 밍크고래의 피를 분석한 자료가 쓰였다.
밍크고래는 세상에서 가장 흔한 큰 고래인데, 흔하다 보니 그물에 걸려 죽임을 당하기 일쑤다. 이렇게 죽은 밍크고래는 해경의 조사 후 일반인에게 팔리는데, 그때 고래의 피를 입수했다. 고래의 피 속에 있는 고래세포를 깨고 그 안의 DNA를 해독하면 ‘고래가 왜 고래인지’ 알 수 있는 비밀이 들어 있는 게놈 정보가 나온다. 이 정보가 너무나 많아서 요즘은 이런 게놈 정보를 ‘빅데이터’라고도 한다.
옛날 옛적, 고래와 사람이 같았을 때…
밍크고래 게놈의 빅데이터를 컴퓨터로 분석을 해보니, 고래는 사람과 약 9000만 년 전에 분화됐다. 당시까지만 해도 고래와 사람의 조상이 같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고래는 점차 물속으로 들어가 살도록 진화했다.
다른 생물과 차이를 비교해보면 고래와 사람이 얼마나 비슷한지 가늠할 수 있다. 한국인과 중국인은 약 1만 년 정도, 백인과 한국인은 약 3만 년 정도 차이가 난다. 한국인과 네안데르탈인은 아마 20만 년 정도 차이가 날 것이고, 사람과 침팬지는 약 600만 년 정도로 떨어져 있다. 수십억 년의 생명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지구상에서 고래는 인간과 형제처럼 가깝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래서 고래는 사람과 비슷하게 생각하고, 사랑하고, 투쟁하고, 늙어간다. 한국 연구자들이 밝혀낸 고래 게놈을 통해, 우리는 고래가 어떤 동물인지를 매우 잘 알게 됐다. 고래 게놈의 다양성을 컴퓨터로 계산해, 고래가 얼마나 멸종위기에 있는지에 대한 정보도 파악했다. 고래는 기본적으로 물속에서 산소를 잘 운반하도록 진화했고, 오래 살 수 있고, 손발 대신 지느러미를 가진 동물임이 유전자를 통해서 나타났다. 또, 물속에선 냄새를 맡을 필요가 없어서 후각이 매우 나빠졌다.
한국의 밍크고래뿐 아니라, 미국에서 잡힌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핀고래(fin whale)도 분석했다. 이빨이 있는 돌고래의 게놈을 해독해보니, 수염고래들은 이빨을 만드는 유전자가 망가져 이빨이 없음을 알게 됐다. 결국 생김새나, 행동이 유전자에 고스란히 모두 프로그램돼 있었던 것이다. 고래를 알려면 고래의 게놈을 제대로 알면 되는 것이다.
고래는 대한민국 바다의 상징적 동물이다. 한국 바다엔 고래도 많고, 고래사냥도 많았다. 고래의 존재를 가장 적나라하게 알려주는 고래 게놈이 한국 바다에서 가장 먼저 밝혀진 이유다.
고래 고기 바구니에 담긴 생로병사의 열쇠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인간과 다른 동물을 비교하면 된다. 게놈 정보는 가장 중요한 비교 정보다. 한국 과학자들은 고래뿐 아니라 호랑이, 사자, 표범, 독수리 게놈도 세계 최초로 해독했다. 이 동물들의 게놈을 통해 인간과 어디가 다른지 알게 됐다. 우리가 왜 어떤 질병에 잘 걸리는지, 우리는 왜 이렇게 생겼는지, 왜 언어를 가지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고래는 우리가 우리를 알아가는 데 너무나도 소중한 정보를 제공했다. 앞으로 인간이 암에도 걸리지 않고 오래 살게 되는 날이 올 때, 그 행복의 일부는 분명 고래들에게 빚진 것이다. 옛날 고래 고기를 파는 아주머니의 바구니에는, 그 고기보다 몇 곱절 소중한 고래의 수천만 년 역사가 정밀하게 기록된 게놈 정보가 담겨져 있었다. 한국 사람들은 고래의 숨은 가치를 알고 고래를 보존해 고래 고기가 아닌, 고래의 게놈을 사야 한다.
글 박종화 생명과학부 교수
영국 캠브리지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박종화 교수는 국내 생명정보학 연구 1세대다. 현재 UNIST 생명과학부 소속으로 게놈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그는 세상 모든 생명체의 게놈을 해독해 그 존재의 이해를 넘어, 이를 이용한 ‘무병장수의 기술’ 개발을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