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물 중 97%를 차지하는 바닷물을 이용해 에너지를 만드는 ‘해수전지’. 에너지 및 화학공학부의 김영식 교수가 오랫동안 품은 꿈이다. 3년 전까지만 해도 바닷물로 전지를 만들겠다는 그의 도전에 학계의 반응은 차가웠다. 하지만 김 교수는 끈기 있게 연구해 해수전지의 구현 가능성을 입증했다. 최근 한국전력, 동서발전에서도 해수전지 개발에 투자하겠다고 나섰다.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묵묵히 개척하고 있는 김영식 교수를 만났다.
일상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전지는 ‘리튬 이온 배터리’다. 리튬이 금속 중 가장 가벼울 뿐만 아니라 에너지 밀도도 높기 때문에 세계 충전지 시장의 주력상품이 된 것이다. 그러나 리튬은 지각의 0.002%에 불과한 희소금속이라 언젠가는 고갈된다. 이에 연구자들은 리튬 이온 배터리를 대체할 차세대 전지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김영식 교수는 다양한 대체 자원 중 바닷물(海水)에 집중했다. 지구 표면의 70% 이상을 덮고 있는 해수로 전지를 만들면 리튬처럼 고갈될 걱정이 없다. 또 리튬처럼 비싸지도 않아 전지 제조비 자체를 낮출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리튬 이온 배터리의 가격에서 소재 값만 하더라도 50% 이상을 차지합니다. 이 가격을 유지한 채 전기자동차 등에 사용할 대용량 배터리를 만든다면 엄청난 비용이 들겠죠. 가격을 낮추려면 배터리 소재를 리튬이 아닌 다른 물질로 바꾸는 수밖에 없습니다. 저렴한 해수를 소재로 쓰는 해수전지가 상용화되면 대용량 배터리를 저렴하게 만들 수 있을 거예요.”
해수전지는 바닷물에 있는 소듐 이온(Na⁺)을 이용해 전기 에너지를 저장하는 장치다. 우리가 익히 알 듯 바닷물에는 소금(NaCl)이 이온 형태로 녹아 있다. 이 중 소듐 이온은 리튬 이온처럼 전지의 양극과 음극을 오가며 에너지를 저장하거나 전기를 발생시킬 수 있다.
바닷물 속 소듐 캐내 전기 저장
해수전지에 전기를 공급해 충전시키면, 양극에 넣어 준 바닷물에서 소듐 이온만 음극으로 이동한다. 음극 소재는 소듐 금속이나 탄소재료인데, 여기에 소듐 이온이 쌓이면 전압이 높아진다. 쉽게 말해 전기 에너지를 흘려버리지 않고 해수전지의 음극에 담아둘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때 양극에 남은 염소 이온(Cl⁻)은 기체가 돼 날아간다. 바닷물에서 소금이 빠져나가므로 반응 후 남은 물을 마시는 것도 가능하다.
해수전지에 충전된 전기를 꺼내 쓸 때(방전)는 음극에 있던 소듐 이온이 다시 양극으로 이동한다. 이때 소듐 이온(Na⁺)이 물 속 수산화기(OH⁻)와 반응해 수산화나트륨(NaOH)이 된다.
김영식 교수는 “해수전지 장치를 바닷물에 담가 두기만 하면 소듐 이온을 무한대로 사용할 수 있다”며 “대형 선박이나 잠수함, 원자력 발전소 냉각장치의 전원으로 활용 가능할 것”이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김 교수는 UNIST에 터를 잡은 지 3년 만에 해수전지 개발에 성공했다. 성공비결은 바닷물에서 소듐 이온만 선택적으로 통과시키는 세라믹 소재에 있다. 해수전지에서 양극과 음극을 가로막는 분리막이자 전해질로는 ‘나시콘(NASICON)’이라는 세라믹 소재가 들어간다. 김 교수팀은 이 물질이 소듐 이온만 통과시키는 성질에 착안해 해수전지에 도입한 것이다.
이후 소재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동전 형태의 해수전지 시제품도 제작했다. 이 기술의 잠재력을 알아본 한국전력과 동서발전은 해수전지 상용화 프로젝트를 위한 투자에 나섰다. 이들은 해수전지를 구성하는 각 소재를 개발하고 전지의 기본 단위인 셀(cell)의 최적화와 표준화, 규격화를 진행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친환경, 초저가, 고안정성 해수전지’를 상용화하는 게 최종 목표다.
“해수전지와 해수전지팩을 만들고 이걸 에너지 시스템으로 연계하려고 합니다. 이 단계가 완성되면 단일 전지로 쓰는 것은 물론, 너무 많이 만들어진 전기 에너지는 저장했다가 부족할 때 꺼내 쓰는 에너지 저장 시스템(ESS, Energy Storage System)으로 활용할 수 있을 거예요.”
해수전지 연구는 ㈜포투원에서
김영식 교수가 해수전지 기술을 선보이자, 전 세계 소재 연구자들에게 문의가 쇄도했다. 그중에는 연구 중인 소재 표본을 보내며 성능 시험을 하고 싶다는 이도 있었다.
“처음에는 저희 연구실에서 일일이 시험해 줬어요. 하지만 표본량이 많아지자 감당하기 어렵더라고요. 해수전지 시험용 장비가 절실했어요. 리튬 이온 배터리는 세계 각지에서 연구 중이라 자료도 많고 장비를 구하기도 쉽습니다. 하지만 해수전지 연구는 저희가 처음이다 보니 변변한 조력자가 없었어요.”
이런 환경을 개선하고자 김영식 교수는 ㈜포투원(Four to One)을 창업했다. 목적은 더 많은 사람이 해수전지 관련 기술에 뛰어들 기반을 마련하는 데 있다. 더 많은 연구자가 관심을 가져야 해수전지도 리튬 이온 배터리처럼 빠르게 발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재작년 설립한 이 기업이 가장 먼저 제작한 동전 형태의 해수전지와 시험용 키트를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기업 이름을 포투원으로 지은 건 기업 설립일이 4월 21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엔 이 기업의 철학까지 담겨 있다. 수익을 위해 시작한 회사가 아니니 돈을 벌면 4분의 1 정도는 사회에 환원하자는 것이다. 처음 해수전지 연구를 시작할 때만 해도 김 교수의 연구에 의문을 품는 시선이 많았다.
선행 기술은 없는지, 이론만 가능하고 실현 불가능한 건 아닌지 검증하는 시간이 수개월 이상 흘렀다. 이 모든 시간을 이겨 낸 김 교수는 어느새 해수전지 상용화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가 만든 해수전지가 개척하는 미래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