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러렌, 탄소나노튜브, 그래핀. 지난 한 세대 동안 나노과학을 상징해 온 ‘탄소 3형제’다. 1990년대 이후 탄소 3형제를 대상으로 400여 편의 논문을 쓴 이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 로드니 루오프 자연과학부 특훈교수. 지금까지 그의 논문들이 인용된 횟수를 다 합치면 무려 10만 회가 넘는다. 도대체 탄소 3형제의 어떤 면이 그를 매혹시켰기에 학자의 삶 대부분을 헌신해 이처럼 대단한 결과를 얻은 걸까. 최근에는 이들 재료 외에 또 다른 놀라운 탄소 재료들을 만드는 꿈을 꾸고 있다는 루오프 교수를 만나 본다.
“대학에서 들은 화학 강의가 전공을 바꾸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오늘날 화려한 경력에 비춰볼 때 어릴 때부터 화학자를 꿈꿔왔을 것 같은데 뜻밖에 고등학생 루오프는 코넬대 공대에 진학했다. 그런데 우연히 들은 저명한 물리화학자 벤저민 위덤 교수의 강의가 그의 인생행로를 바꿨다. 루오프는 화학으로 전공을 바꾸면서 학교도 텍사스대로 옮겼다. 그곳 자연풍광이 좋아 멋진 학창 시절을 보냈다고. 그리고 일리노이대에서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그런데 학위를 받는 데 7년이나 걸렸다. 지금의 루오프 교수를 떠올리면 역시 뜻밖이다.
“그런가요? 사실 실험은 이론에 비해 학위를 받는 데 시간이 좀 더 걸려 보통 5~6년의 기간이 필요하죠.”
실험에 소질이 없어 힘들게 학위를 받고 나서야 뒤늦게 감을 잡았나 생각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이 기간 동안 루오프가 쓴 논문이 무려 23편이나 됐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연구에 푹 빠져 있어서 학위를 받는 데에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연구가 학위를 받는 수단으로 전락한 경우를 종종 보는 요즘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루오프, 탄소 3형제를 만나다
루오프의 박사과정 연구주제는 분광학이라는 물리화학 분야다. 간단히 말해 분자에 빛(전자기파)을 쪼여 준 뒤 나오는 흡수 및 방출 스펙트럼을 분석해 분자의 구조를 규명하는 연구다. 그는 레이저를 이용해 절대온도 1도(영하 272℃)에 가까운 극저온을 만들어 좀 더 깨끗한 데이터를 얻는 데 성공했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탄소 3형제를 연구하는 재료과학자가 됐을까.
“박사과정 중이던 1985년 풀러렌을 발견했다는 논문이 학술지 <네이처>에 실렸습니다. 그런데 그 연구를 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인 라이스대의 리처드 스몰리 교수 역시 분광학자였죠. 따라서 바로 논문을 읽어 봤지만 당시 할 일이 워낙 많아 거기까지였죠.”
풀러렌(fullerene)은 육각형 20개와 오각형 12개로 이뤄진 축구공과 동일한 패턴의 구형 분자로, 꼭짓점 60개 각각에 탄소 원자가 배치돼 있다. 따라서 분자식은 ‘C60’이다. 많은 화학자가 풀러렌을 가장 아름다운 분자라고 치켜 세운다.
1988년 학위를 받고 박사 후 연구원으로 IBM연구소에 들어간 루오프 박사는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풀러렌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기업연구소임에도 당시에는 연구원들이 마음대로 주제를 선택해 연구할 수 있었다. 루오프 박사가 1991년 <네이처>에 실은 논문은 두 가지 이유에서 흥미롭다. 먼저 연구내용으로는 엄청난 압력으로 눌러도 깨지지 않을 정도로 풀러렌이 강한 분자임을 보였다. 다음은 논문의 저자 이름으로 두 사람인데 둘 다 루오프다.
“공동저자인 아서 루오프는 사실 제 아버지입니다. 고압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연구하는 물리화학자죠. 아버지와 함께 연구한 건 그때가 유일한데 지금 생각해도 행복한 경험이었습니다.”
아서 루오프는 현재 코넬대 재료과학과 명예교수다. 그런데 이 무렵 또 다른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다. 일본전기회사(NEC)의 이지마 스미오 박사팀이 탄소나노튜브(carbon nanotube)를 발견했다는 내용이었다. 탄소나노튜브는 풀러렌을 양쪽으로 길게 늘인 구조로 역시 탄소로만 이뤄져 있다. 많은 과학자가 탄소나노튜브가 풀러렌보다 재료로서 훨씬 잠재력이 크다고 판단하고 연구에 뛰어들었다.
비영리 연구기관인 스탠포드국제연구소(SRI International), 워싱턴대를 거쳐 모교인 텍사스대에 자리를 잡은 루오프 교수 역시 풀러렌과 탄소나노튜브에 대한 다양한 측면의 연구를 진행했다. 원자힘현미경을 이용한 구조분석, 양파처럼 여러 층으로 된 다층탄소나노튜브의 강도 규명, 탄소나노튜브가 포함된 복잡재료의 물성 규명 등을 주제로 논문을 쏟아냈다.
1990년대 말 루오프 교수는 흑연에서 그래핀(graphene)을 분리하는 실험에 착수했다. 탄소 원자가 2차원 평면에 배열된 그래핀이 무수히 겹쳐져 흑연을 이루지만 정작 그래핀 자체를 분리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1999년 루오프 교수팀은 흑연에서 그래핀 몇 개 층을 분리하는 데까지 갔다. 그러나 그래핀 한 층을 분리하는 데 성공한 건 2004년 영국 맨체스터대 물리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스카치테이프를 붙였다 떼는 간단한 방법으로 흑연에서 그래핀 한 층을 떼어냈다.
지난 10여 년 동안 루오프 교수팀은 그래핀 관련 논문을 무려 130여 편이나 발표했다. 이 가운데는 화학증기증착법(CVD)으로 폭이 수 cm인 ‘거대한’ 그래핀을 합성하는 데 성공했음을 보고한 2009년 논문과 다공성 그래핀 산화물을 이용한 수퍼축전지를 소개한 2011년 논문이 유명하다. 두 논문 모두 학술지 <사이언스>에 실렸다.
이론 속 구조 실험으로 실현되기를 기대
나노재료 분야의 손꼽히는 석학으로 텍사스대에서 안정된 연구생활을 해오던 루오프 교수가 2013년 조국 미국을 떠나 낯선 우리나라에 자리를 잡았다.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서구에 비해 아시아는 다이내믹합니다. 특히 한국은 더 그렇고요. 게다가 UNIST처럼 새로 시작하는 곳은 제 꿈을 펼치기에 이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자칫 현실에 안주할 수 있는 시점에서 생활환경을 180도 바꿔 연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으려는 시도였던 셈이다. 루오프 교수는 기초과학연구원(IBS)의 ‘다차원탄소재료연구단(CMCM)’ 단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한마디로 과학자로서 경력의 정점을 한국에서 보내겠다는 포부다.
요즘 루오프 교수는 탄소나노튜브나 그래핀 등 기존 탄소재료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탄소재료를 만드는 장기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그가 꼭 만들고 싶어 하는 탄소재료들은 뜻밖에도 고등학교 화학 지식만 있어도 어렵지 않게 그 구조를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물질들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게 오히려 더 놀랍다.
예를 들어 그래페인(graphane)을 보자. 그래핀은 탄소원자 사이에 이중결합이 교대로 있는 평면분자로, 화학 용어를 쓰면 각 탄소는 sp2결합을 하고 있다. 그래페인은 탄소 사이의 이중결합에 수소를 넣어 단일결합으로 바뀐 상태로, 역시 평면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탄소원자들이 지그재그로 배치돼 있다(sp3결합). 즉 수소로 포화된 탄화수소이므로 어미에 ‘-ane’가 붙었다. 그런데 과학자들이 이런 간단한 구조를 아직도 못 만들었다는 말인가.
“많은 사람이 시도했지만 sp2 탄소 원자를 100% sp3로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이중결합이 남아 있다는 뜻이죠. 완벽한 그래페인을 만들 수 있다면 이를 바탕으로 흥미로운 특성을 지닌 재료들이 나올 수 있을 텐데 말이죠.”
한편 이중층 그래핀에서 위 아래층 탄소들을 서로 공유결합으로 연결하게 되면 다이아메인(diamane)이라는 물질이 된다. 탄소 원소 두 개 층으로 된 아주 얇은 다이아몬드인 셈인데 역시 만들 수만 있다면 기존에 없는 우수한 전자기적 기계적 특성을 지닌 재료가 될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 다이아메인 합성에 성공한 과학자도 없다.
다이아몬드섬유(diamond fiber)도 루오프 교수가 꿈꾸는 물질이다. 탄소섬유(carbon fiber)가 섬유 형태의 흑연, 즉 그래핀이 층층이 포개진 상태라면 다이아몬드섬유는 각 층의 탄소원자들이 공유결합을 해 단단하게 묶인 상태다. 따라서 강도가 탄소섬유보다 훨씬 강할 것이다. 참고로 탄소섬유의 강도는 같은 무게의 강철섬유보다도 훨씬 강해 항공기 등 강도는 유지하되 무게를 줄이는 게 중요한 고가제품에 널리 쓰이고 있다.
“물론 다이아몬드섬유를 만드는 게 장기적인 목표이지만 탄소섬유 역시 새로운 합성법을 개발하면 좀 더 뛰어난 재료가 될 것입니다.”
독일의 프라운호퍼연구소는 지난해 UNIST에 한국분원을 열었다. 루오프 교수팀은 프리운호퍼나 인근 현대자동차 연구소 등에서도 관심을 가질만한 고효율의 가벼운 탄소섬유 기반 복합재료를 개발하는 연구를 시도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많은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니 ‘사람이 힘’이라는 말이 더욱 실감난다.
“현재 실험실에는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박사 후 연구원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대학원의 경우 한국 학생이 네 명, 중국 학생이 두 명이죠. 그리고 학부생들도 몇 명 있습니다.”
일단 실험실에 적을 두면 학부생들도 연구에 참여해야 하는데 루오프 교수는 이런 경험이 참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아무리 똑똑해도 연구에 별 취미가 없으면 과학자가 되기는 어렵다. 따라서 학부 2학년부터 실험실 생활을 해 보면 본인이 과학자로서 자질이 있는가를 스스로 깨달을 수 있고 미래를 설계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루오프 교수는 자신과 동료들이 아이디어를 내고 이론 연구를 통해 가능성을 확인한 새로운 탄소재료들의 구조 모형을 바라보며 재능과 열정이 있는 젊은이들에게 ‘흥미와 영감’을 줄 수 있기를 기대했다.
“지난 20세기 탄소는 주로 유기화합물이나 고분자의 형태로 인류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21세기에도 새로운 탄소재료가 사람들의 생활을 바꿀 것입니다.”
글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서울대 화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지내며『강석기의 과학카페』, 『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를 저술했으며, 옮긴 책으로는 『반물질』, 『가슴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