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리는 현대인의 삶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하다. 손에서 잠시라도 떼지 않는 스마트폰부터 전기자동차까지 배터리가 없으면 안되는 사회가 됐기 때문이다. 배터리 중에서도 충전해서 다시 쓰는 ‘이차전지’에 대한 수요는 빠르게 늘고 있다. 그만큼 이차전지 연구도 중요해졌다. 2009년 개교 때부터 이차전지 연구에 집중했던 UNIST가 배터리 연구에 매진할 수 있는 번듯한 연구센터를 갖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난 12월 UNIST 캠퍼스 한쪽에 근사한 건물이 하나 들어섰다. ‘Battery R&D Center’라는 글씨가 쓰인 이 건물은 3월 준공식을 앞둔 ‘미래형 이차전지 산학연 연구센터(이하 이차전지 연구센터)’다. 지금까지 다른 건물에 있던 배터리 연구 장비를 한데 모으고, 연구진도 이 건물로 들어왔다. 본격적으로 사람의 발길이 닿기 시작한 연구센터의 이모저모를 둘러봤다.
이차전지 연구센터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5층으로 전체 면적이 6364㎡ 규모에 이른다. 건립에 들어간 비용도 국비 150억 원, UNIST 27억 원 등 총 177억 원이나 된다. 세계적으로도 배터리 연구를 위해 이 정도 연구센터를 건립한 사례는 드문 편이다. 이곳에서는 스마트폰이나 IT기기에 들어가는 소형 배터리와 전기자동차나 에너지저장장치에 들어가는 중대형 배터리에 대한 총체적인 연구가 진행된다.
연구 주제는 다양하지만 배터리 연구의 목표는 단순명료했다. 빠르게 충전해 오랫동안 사용하는 것. 그런데 최근 삼성 갤럭시 노트7의 발화로 ‘배터리 안전성’이라는 목표가 하나 더 추가됐다.
스마트 기기 하나에서 전화 통화, 음악 감상, 자료 검색 등 다양한 기능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면 사용 전류량이 늘어난다. 이는 배터리 과부하로 이어지는데, 이때 내부에 열이 발생한다. 이 열이 화재로 이어지지 않기 위해서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이차전지 연구센터 역시 ‘빠르게 충전해 오래 가는 안전한 배터리’를 큰 목표로 삼고 있다.
배터리 제조부터 성능실험, 분석까지 한자리에서!
배터리는 양극, 음극, 전해질, 분리막, 4개의 기본 요소로 구성된다. 양극과 음극은 전해질과 접촉해 전하를 주고받는데, 이때 전류가 흐르면서 충전과 방전이 이뤄진다. 음극에서 양극으로 전하가 이동하면 우리가 전기를 이용하는 방전이고, 반대의 경우는 충전이다. 분리막은 양극과 음극 사이에 위치하며 두 전극이 직접 만나지 않도록 막는 역할을 한다.
가장 많이 쓰이는 이차전지는 리튬 이온 배터리다. 현재 가장 효율적인 이차전지로도 손꼽히는 리튬 이온은 다른 금속 이온에 비해 작고 가벼워 에너지 밀도가 높다.
리튬 이온 배터리를 만들려면 우선 고체 혼합물을 녹여 액체 상태의 슬러리(slurry)로 만든다. 슬러리는 고체 알갱이가 액체에 분산돼 퍼진 형태를 말한다. 이 슬러리를 알루미늄 호일로 감싸면 양극이, 구리판 위에 올리면 음극이 된다. 이들을 분리막과 결합해 상자 안에 넣고 전해질을 주입한다. 그런 다음 특수 조립기에 넣어 합치면 배터리가 완성된다.
양극, 음극, 분리막, 전해질을 조립하는 공정에선 수분이 0.6% 이하인 건조한 상태가 유지돼야 한다. 그래서 이차전지 연구센터 1층에는 건조한 특수 실험실인 ‘드라이 룸(dry room)’이 마련돼 있다. 1층에는 드라이 룸 외에도 최첨단 분석 설비 등이 갖춰져 배터리의 성능을 빠르고 간편하게 확인해 가면서 시제품을 만들 수 있다.
2층부터 4층까지는 연구진의 실험실과 실제 배터리 양산과 비슷한 생산 시설, 벤처 연구소 등이 들어섰다. 이렇게 최첨단 연구시설과 연구진들이 한자리에 모여 이차전지만 전문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은 세계적으로도 찾기 힘들다. 배터리 연구자들의 천국이 마련되기까지는 이차전지 연구센터장인 조재필 교수를 비롯한 UNIST 배터리 연구자들의 오랜 노력이 있었다.
함께 하는 연구, 커지는 시너지 효과
개교 초부터 UNIST의 이차전지 연구를 이끌어 온 조재필 센터장은 세계 각지에서 활약 중인 이차전지 연구자들을 UNIST로 불러 모았다. 우수한 연구자가 모여 가까이서 협력하다 보면 더 좋은 연구를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의 노력 끝에 2009년 3명뿐이었던 이차전지 연구자는 11명으로 늘었다. 국내 대학 중 가장 많은 이차전지 연구자를 보유한 곳도 UNIST가 됐다.
2011년에는 이차전지로 특화된 대학원 프로그램인 ‘배터리 사이언스 테크놀로지’ 과정도 개설했다. 여기서 길러진 인재들은 이차전지 연구센터에서 연구하며 세계를 선도할 기술을 개발했다.
인적 자원이 확보된 데다 수십억 원에 이르는 최첨단 장비까지 갖추자 우수한 성과가 자연스레 뒤따랐다. 전기차를 1분 만에 충전할 수 있는 원천기술, 자유롭게 구부릴 수 있는 리튬 이온 배터리, 잉크젯 프린터로 인쇄하는 배터리, 터지지 않는 전고체 전지 관련 기술 등 각종 연구 결과가 속속 발표됐다.
다만 이차전지 관련 장비와 연구자들이 캠퍼스 곳곳에 분산됐다는 점이 아쉬웠다. 자주 만나고 필요한 장비를 공유하면 연구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바람이 실현된 결과가 이차전지 연구센터다. 이곳에 모인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시점인데도 연구자들은 편리함을 실감하고 있다.
“전지 관련 설비들이 모두 한 건물에 갖춰져 있기 때문에 전지 조립과 분석을 신속하게 할 수 있어요. 연구를 위해 만든 전지 표본은 최대한 공기와 덜 만나야 하는데, 과거에는 분석 장비들이 따로 떨어져 있어서 아무래도 이동 중에 오염되기 쉬웠거든요. 무엇보다 각 연구실에 흩어져 있던 연구자들을 모으니 연구가 막힐 때마다 빨리 모여서 의논할 수 있어요. 굉장히 편리해졌습니다.”
조재필 센터장은 이차전지 각 분야의 연구자들이 한데 모여 협업이 가능하게 된 점을 강조했다.
조 교수는 자신의 전문 분야인 음극과 양극을 제외한 다른 분야는 동료 연구자에게 자문한다. 개발한 양극와 음극의 성능을 평가하는 데 중요한 전해액은 최남순 교수에게 연락해 도움을 구한다. 특수 전해액이 필요할 때는 개발한 음극과 양극에 맞춰 개발을 의뢰하기도 한다. 고분자는 이상영 교수에게, 전고체 전지는 정윤석 교수에게 묻는다.
이처럼 이차전지 연구를 위한 집약적인 R&D센터는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이차전지 각 분야의 전문가는 물론, 다른 분야의 전문가도 이차전지 연구와 융합해 시너지를 발휘하고 있다. 이 건물에 상주하는 100명 이상의 연구원도 모두 이차전지 연구를 이끌고 있는 고급 인재들이다.
원천기술 개발과 상용화, 두 마리 토끼를 잡아라!
번듯한 건물과 최첨단 장비, 최고의 연구진이 모인 이차전지 연구센터는 앞으로도 세계적인 배터리 연구를 수행할 예정이다. 이들의 연구는 논문을 내는 데 그치지 않고 산업계에 적용될 방향까지 염두에 두고 진행된다.
조 센터장은 “처음에는 연구자로서 논문을 발표하고, 그 논문이 학계에서 얼마나 반향을 일으켰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며 “그렇게 되면 논문을 위한 연구에 매몰될 가능성이 커 정작 기술이 사회에 적용되기는 어려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차전지 연구센터의 연구진도 다른 연구자들처럼 기본적으로 원천기술 개발을 고민한다. 그러나 이들은 ‘그 기술이 실제로 사업화가 가능한지’를 늘 염두에 둔다. 실제로 양산 가능한 수준으로 만들어 보고 논문을 발표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논문의 질이 좋아지는 것은 물론 산업계에서도 더 설득력 있는 기술로 받아들인다.
UNIST의 이차전지 연구는 이차전지 연구센터의 등장으로 한층 더 발전될 전망이다. UNIST에서 탄생한 기술이 세계 곳곳의 배터리를 작고, 빠르게 충전되며, 오래가는 데다 안전하게 만들 미래를 그려 본다.
ABOUT UNIST Future Batteries R&D Center
UNIST 캠퍼스의 건물들은 가막못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배치됐다. 이차전지 연구센터는 이런 형태에서 벗어나 북향의 경사면에 위치해 있다. 건축 환경 측면에서는 불리한 조건이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정림건축의 이명진 소장은 캠퍼스의 건축적 질서와 건물의 자연 조건 사이의 접점을 찾는 것부터 시작했다. 건축사의 오랜 고민 끝에 이 건물은 캠퍼스 질서에 속하면서도, 고유의 정체성을 동시에 확보한 모습으로 지어졌다.
건물 내부는 분야 간 소통과 융합을 통해 지식의 통섭을 추구하고자 하는 연구의 흐름을 표현했다. 사무공간과 실험공간을 마주보도록 배치해 각 영역의 평면적 관계성을 높였다. 사무공간의 외부는 가벼운 금속으로, 실험공간은 무겁고 단단한 석재로 처리하여 두 공간의 대비를 통한 조화를 꾀하였다.
건물 중앙은 통째로 비워 입체적 일체감을 강화하고, 답답할 뻔했던 내부 공간에 빛과 바람을 끌어들였다. 두 공간은 나무 다리로 연결해 소통의 의미를 강조했다. 자칫 차갑고 기능적이라고 느끼기 쉬운 연구소를 따뜻한 감성과 자연적 요소를 도입해 활력 있는 공간으로 꾸민 것이다.
이명진 소장은 “이차전지 연구센터에 영감을 준 건물은 스탠포드대의 제임스 클라크 센터, 하버드대의 노스웨스트 사이언스 빌딩, 매사추세츠공과대(MIT)의 미디어랩이다”며 “이곳에서 다양한 소통과 교류가 일어나 세계적인 연구 성과가 나오고, 연구자에겐 최상의 환경을 제공하는 동시에 UNIST를 대표하는 연구센터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