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미국의 화려한 우주개발역사 뒤에는 숨은 인재들의 활약이 있었다. ‘흑인’과 ‘여성’이라는 이중고를 딛고 자기 몫을 톡톡히 해낸 세 여성과학자들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영화 <히든 피겨스>에 담겨 전 세계로 알려졌다. 이를 계기로 여성 과학자들의 역할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UNIST MAGAZINE에서도 과학자의 길은 선택한 멋진 여성들의 이야기를 준비했다.
HIDDEN FIGURES 2. 최남순 에너지 및 화학공학부 교수
“화학공학과 소개만 보고 ‘저길 가면 전지전능(全知全能)해지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엔 취업이 중요했는데 그럴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최남순 에너지 및 화학공학부 교수는 이과 과목을 잘해서 자연스레 이공계로 진학했다. 전공은 가장 친한 친구의 영향으로 선택했다. 그 친구가 화학공학과에 수석 입학하면서 관심이 갔던 것이다.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기보다 ‘일단 가보자’는 생각이 앞섰다.
“대학원 연구실에서 ‘전지’를 연구하게 됐어요. 처음 글러브 박스(glove box)에서 실험하는 순간 제가 이 분야에 ‘소질’이 있다는 걸 느꼈죠. 장갑 끼고 감각이 둔해져도 실험에 필요한 시료(sample)를 정확한 무게로 덜어냈거든요.”
전지 연구를 하려면 수분에 민감한 소재들을 다뤄야 한다. 그래서 밀폐된 공간에 손만 넣어 시료를 다루는 글러브 박스를 쓴다. 손을 상자 속에 넣고 장갑까지 끼다보니 둔해지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최 교수는 전극을 턱턱 잘라도 정확한 치수대로 절단됐다. 실험이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손 감각을 살릴 실험을 계속 하고 싶어 전지 연구자가 됐다.
“다른 연구자가 해결하지 못한 메커니즘을 규명할 때마다 큰 성취감을 얻어요. 그 성취감은 다음 연구를 이어나가는 동기가 되죠. UNIST는 학부생 때부터 연구실에서 실험할 수 있는데요. 이 경험이 연구자로서 길을 결정하는 데 굉장히 중요하다고 봐요. 제가 대학원생 시절 그랬던 것처럼 말이에요.”
최남순 교수는 입시가 강조되다 보면 학생의 과학적 재능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짚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UNIST를 비롯한 일부 대학에서는 학부생 인턴십 제도를 운영한다는 점이다. 그녀는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서는 무엇에 흥미가 있는지 찾고 도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며 “재능과 열정을 최대한 끌어내는 과학자가 되고 싶다면 부지런히 탐색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능한 전지’를 향하는 성실한 연구자
최 교수는 메모광이다. 오늘 할 일부터 몇 년 뒤에 이뤄야 할 일까지 전부 메모해서 붙여둔다. 아침 일과도 그 메모부터 시작한다. 절대 잊지 않고, 꼭 해내려 다짐하는 것이다. 이 중에는 ‘전능한 전지’에 관한 것도 있다.
“처음 화학공학과 소개를 보고 느꼈던 전지전능은 전지 분야에서 구현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전능한 전지’를 만들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최 교수는 무엇보다 ‘성실’이 과학자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특히 실험 기반 연구자의 길을 걸으려면 부지런해져야 한다. 그녀는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끌어내주는 것이 성실” 이라며 “성실한 만큼 답이 나오는 것이 과학”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이차전지 분야 중 ‘전해질’ 연구로 주목받는다. 전해질은 전지 내에서 에너지를 가진 이온이 다니는 길이다. 그녀는 왜 이 분야에 집중하게 됐을까.
“전해질 분야는 ‘블루오션’이라 불릴 정도로 연구하는 사람이 적어요. 전극 내 복잡한 상호작용이 일어나서 산업체 경험도 중요하고요. 전 삼성SDI에서 책임연구원으로 있으며 전해질을 다뤄봤고, 그 덕에 다른 연구자들과 차별화된 연구도 가능했죠.”
최 교수의 기술은 이제 산업체에 이전하는 수준까지 왔다. 올해 초에는 고전압 조건에서도 전지 성능이 좋은 전해질 소재 기술을 개발해 국내 기업에 기술이전을 마쳤다. 그녀의 다음 목표는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전해질 소재 전문가다. 이를 위해 전해질 기능 향상을 위한 신소재를 개발하고, 이들이 전지 내에서 작동하는 메커니즘 규명을 동시에 진행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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