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IST 교정에 어둠이 깔리면 강의실과 운동장, 스포츠 센터 등 곳곳에 학생들이 모인다. 리더십 프로그램 중 ‘피어 리더십(Peer Leadership)’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피어 리더십은 학생들 스스로 누군가를 가르치는 강사가 되거나, 친구를 스승으로 삼아 무언가를 배워나가면서 리더십을 배우는 과정이다. 다양한 활동을 통해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중에 더불어 사는 세상을 배우고, 그 과정에서 ‘진짜 리더십’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2017년 UNIST 리더십 프로그램에 새로운 과정이 생겼다. 따로 강사를 초청하지 않고 학생 스스로 강사로 나서 동료들을 가르치는 ‘피어 리더십’이다. 학생들이 원하는 강좌를 신청해 개설할 수 있으며, 수강인원도 유동적이다. 1학기에는 총 12개의 강좌가 만들어져 180여 명이 취미와 지식, 기술을 나누고 있다.
피어 리더십은 다른 리더십 프로그램과 달리 학생자치 활동에 중점을 둔다. 자신의 재능으로 친구들을 가르쳐보면서 내적인 만족감을 느끼고, 친구에게 새로운 지식을 배우면서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것이다. 학생들끼리 가르치고 배우다보니 협동심, 단결심, 공동체의식도 함께 길러진다.
강사도 성적표도 없는 데다 ‘좋아서 만든’ 강좌이다 보니 매 시간 학생들의 반응이 뜨겁다. 수업과 과제, 실험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취미를 즐길 수 있는 덕분이다. 이번 학기 ‘현악기초반’ 강사로 나선 김준하 학생(자연과학부 15)과 ‘웹프로그래밍반’ 강사인 이영준 학생(전기전자컴퓨터공학부 15)을 만나 피어 리더십에 대해 들어봤다.
과학도가 바이올린을 가르친다… 현악기초반의 풍경
“저명한 과학자들도 하나 이상의 악기를 다룰 줄 알았다고 해요. 알버트 아인슈타인, 니콜라 테슬라도 그랬다고 하죠.”
우리의 삶을 바꿔놓은 과학자들이 그랬듯 UNISTAR들도 연구뿐 아니라 취미 활동을 즐긴다. 김준하 학생은 “학업과 연구에만 매달리는 삶보다는 좋아하는 활동을 병행하는 삶이 더 좋다”며 “공부하는 틈틈이 바이올린을 배우고 익히면서 즐거움을 느꼈는데 이걸 친구들과 나누고 싶어 현악기초반을 개설해달라고 신청했다”고 말했다.
현악기초반은 ‘바이올린・비올라반’과 ‘첼로반’ 2개로 나뉘어 있다. 바이올린・비올라반은 강사 5명에 학생 8명, 첼로반은 강사 1명에 학생 4명으로 구성됐다. 강사로 나선 친구들은 자신들의 재능을 공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보람을 느낀다. 누군가를 지도해 보면서 자연스레 리더십도 길러진다. 수강생들도 외부 강사에게 배우는 것보다 편안하게 물어보고 단점을 고칠 수 있어 좋다. 학생 간 수업이다 보니 아무래도 부담감이 줄어든 것이다.
김준하 학생에게 인상적인 학생이 있었는지 물었다. 그러자 카자흐스탄 출신 누르토레우브 잔크딜(Nurtoleuov Zhanqdil) 학생을 떠올렸다.
“바이올린 활을 집는 방법도 모른 채 현악기초반을 찾았더라고요. 영어로 간단하게 소통할 수는 있었지만 악기 연주를 가르치는 건 쉽지 않더라고요. 손짓과 발짓을 다 동원해가며 가르치다 보니 영어 실력까지 늘어났죠.”
준하 학생의 열정적인 노력 덕분에 잔크딜 학생은 바이올린으로 동요를 연주할 수 있는 수준까지 성장했다. 다른 친구들을 지도하면 자신의 미흡함이 더 잘 보인다는 준하 학생. 그는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경험은 여러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준다고 전했다.
‘멋쟁이 사자처럼’ 우리도 웹프로그래밍에 도전!
웹프로그래밍반에는 이영준 학생을 비롯한 10명의 강사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멋쟁이 사자처럼(Like Lion)’이라는 모임 소속인데, 이 모임에서는 미국과 일본, 한국 등의 대학생이 모여 서로 웹프로그래밍을 가르치고 배운다.
“멋쟁이 사자처럼에 우리나라 학생들이 참여한 건 2013년 서울대가 처음이었어요. UNIST 학생들은 2015년부터 참여했죠. 이런 프로그램이 학교 안에서도 진행되면 좋을 것 같아서 피어 리더십 강좌 개설을 신청했어요.”
웹프로그래밍 강좌를 듣겠다고 신청한 학생은 15명이다. 이 중에는 웹프로그래밍을 처음 접하는 친구도 있고, 어느 정도 기본을 갖춘 친구도 있다. 각자 수준이 다르기 때문에 강사 10명이 학생들의 눈높이를 고려해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영준 학생은 “웹프로그래밍을 전혀 모르는 학생들에게는 쉽고 재밌게 내용을 전달하고,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학생에게는 세부내용까지 전한다”며 “이런 내용을 준비하다 보면 혼자 공부할 때보다 더 많은 걸 깨닫는다”고 말했다.
웹프로그래밍반 학생들은 밤새면서 프로그래밍을 완성하기도 한다. 일명 ‘해커톤(hackathon)’이다. 해커와 마라톤의 합성어인 해커톤은 소프트웨어 개발 분야에서 사람들이 함께 프로젝트를 완성하는 작업을 말한다. 가르치는 학생과 배우는 학생 모두 밤새 작업을 하면서 고생한 경험은 무척 큰 인상을 남겼다.
“웹프로그래밍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밤새우며 작업하는 게 힘들었을 텐데도, 모두 기대 이상으로 잘해줬어요. 강사들보다도 수강생이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모습을 보면서 보람이 컸어요.”
원하는 건 뭐든 가르치고 배운다
웹프로그래밍 수업에서 강사로 활동 중인 영준 학생도 수강생이 돼 배우고 싶은 게 있다. 바로 사진 촬영이다. 그는 “선물 받은 DSLR 카메라가 있는데 어떻게 쓰는지 잘 모른다”며 “피어 리더십에 개설된 사진 강좌를 신청해 배워보고 싶다”고 말했다.
피어 리더십에는 사진이나 현악기, 웹프로그래밍 외에도 요가, 한국어 강좌, 농구, 복싱, 피아노, 공예품 제작, 작문, 태권도, 면접 준비 등이 마련돼 있다. 누구나 자신의 재능을 기부하는 강사가 될 수 있고, 관심 있는 것들을 배울 수 있다.
물론 학생들끼리 전 과정을 진행하다 보니 아쉬운 점도 있다. 때로 산만한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하고, 강사가 학생의 질문에 똑부러지게 대답을 내놓지 못할 때도 있다. 가끔은 일정도 변경된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에서 학생들은 서로를 이해하며 의견을 조율해 가장 지혜로운 길로 나아간다. 학생들 스스로 리더가 되는 법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최진숙 리더십센터장(기초과정부 교수)은 “피어 리더십의 목표는 당장의 실력 향상이나 결과가 아니라 스스로 리더가 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며 “2학기에도 학생들이 원하는 다양한 강좌를 개설해 글로벌 리더로서 자질을 쌓도록 돕겠다”고 밝혔다.
내 안의 리더를 찾는 시간
일상 속에서 ‘리더(leader)’라는 말은 참 자주 쓰인다. 그렇지만 이 단어의 진정한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볼 기회는 적다. 글로벌 리더로 성장하고 있는 UNISTAR들은 리더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동안 리더는 한 팀에 성공과 실패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만큼 좌중을 휘어잡을 수 있는 카리스마를 지닌 강한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오케스트라에 들어와서 보니 카리스마보다는 선배의 관심과 격려가 더 큰 도움이 되더라고요. 덕분에 즐겁게 악기를 배웠던 기억이 있거든요. 지금 제 생각으로 포용력이 있는 사람이 곧 ‘강한 리더’라고 생각해요.”(김준하 학생)
이영준 학생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가 제시한 리더는 협력과 존중하는 자세로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리더다.
“소수 의견까지 포함해 모든 의견을 경청하고 신중하게 판단을 내려야겠죠. 다른 의견을 제시한 사람에게는 논리적인 근거를 들어서 충분히 납득을 할 수 있도록 설득해야겠고요. 특정 의견에만 집중하지 않고 팀원 모두를 존중하고 협력하는 마음을 가진 리더가 좋은 리더라고 생각합니다.”
피어 리더십은 서로 소통하며 이뤄지는 열린 강좌를 지향한다. 강사라고 가르치기만 하고, 수강생이라고 듣기만 하는 게 아니다. 학생들은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같이 성장해간다.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을 이끌 수 있는 자신만의 힘을 찾는다. 올해 처음 시작된 피어 리더십을 통해 각양각색의 리더로 자라날 UNISTAR들의 내일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