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기기의 디자인과 성능이 상향평준화되면서 배터리가 중요한 차별요소로 부각되고 있다. 최근 수년 사이에도 용량을 키워 사용 시간은 길고 충전 시간은 짧아진 배터리가 장착된 제품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올해 나온 한 노트북의 경우 한 번 충전에 24시간을 쓸 수 있다. 20년 전 필자가 처음 노트북을 샀을 때 4시간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놀라운 발전 속도다. 그러나 여전히 배터리 성능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UNIST 에너지 및 화학공학부 조재필 교수다.
“흑연 사이로 리튬이온이 들어가면 시커먼 전극(음극)이 황금색으로 바뀌면서 빛을 냅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으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죠.”
매일 몇 시간씩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을 쓰는 사람들에게 배터리는 공기와 같다. 기기가 제대로 작동할 때는 존재조차도 잊고 있지만 막상 배터리가 바닥을 드러내 (기기의)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 되면 충전할 콘센트를 찾아 사방을 두리번거리게 된다.
하지만 기기 안에 들어 있는 리튬이온배터리가 충전될 때 흑연 음극에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아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을 것이다. 조재필 교수는 20여 년 동안 리튬이온배터리를 중심으로 이차전지, 즉 충전지 연구를 해오고 있다.
“그동안 리튬이온배터리 성능에 많은 발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이론적인 최대치의 70% 수준입니다. 30% 더 향상할 여지가 있는 것이죠.”
이 30%를 채우는 일을 자기 손으로 해내겠다는 의지가 대단하다. BoT(Battery of Things, 사물배터리) 시대가 하루라도 빨리 실현되는 데 한몫하겠다는 말이다. 참고로 BoT는 수년 전 삼성SDI의 조남성 사장이 IoT(사물인터넷)를 모방해 만든 신조어다.
실제로 배터리를 쓰는 기기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세계 배터리 시장 규모는 급속히 커지고 있다. 현재 리튬이온배터리의 시장 규모는 400억 달러(약 44조 원)가 넘고, 2020년에는 1,000억 달러가 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조재필 교수는 어떻게 이처럼 잘 나가는 분야를 연구하게 됐을까?
“솔직히 뚜렷한 비전을 갖고 학과를 택한 건 아닙니다. 다만 당시 반도체가 막 주목을 받던 시기라 반도체 소재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죠.”
대학원 시절 맺은 배터리와의 인연
1986년 그가 경북대 무기재료공학과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주변에서 “무기(武器)를 만드는 재료를 공부하는 과도 있냐?”고 농담을 했다. 물론 플라스틱 같은 유기(有機)재료를 연구하는 화학(또는 고분자)공학과와 구분하기 위해서 쓴 학과명이다. 그 뒤 ‘무기’가 떨어져 나가고 요즘은 그냥 ‘재료공학’이라고 많이 쓴다.
당시 우리나라는 제5공화국 후반기라 정치적 혼란이 커서 대학에서 제대로 공부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공부에 뜻을 둔 다른 많은 학생들처럼 대학생 조재필도 2학년 때부터 일찌감치 유학을 준비해 미국 아이오와주립대 재료공학과의 입학 허가를 받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6개월 뒤인 1990년 8월 그는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석·박사 5년의 연구 주제는 황화물 유리 전해질을 만드는 일이었다. 배터리는 음극, 양극, 전해질 이렇게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지는데, 당시 액체 전해질은 안정성이 떨어져 고체(유리) 전해질을 개발하게 된 것이다. 대학원 때부터 배터리와 관련을 맺은 셈이다.
1995년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미국 조지아공대에서 박사 후 연구원으로 본격적인 배터리 연구를 시작했다. 이 무렵 국내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이차전지 사업에 뛰어들었고, 그는 이듬해 삼성전관(현 삼성SDI)에 입사했다. 얼마 뒤 학계로 자리를 옮겨 금오공대, 한양대를 거쳐 2009년부터 UNIST에 재직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의 조재필 박사와 몇몇 국내 기업들의 선견지명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1991년 일본 소니(SONY)가 세계 최초로 리튬이온배터리 상용화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인 이차전지 시대가 열렸지만 시장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어요. 심지어 일본 노무라연구소는 ‘2000년대 초에는 시장 포화로 이차전지 산업이 죽는다’고 예측할 정도였으니까요.”
1990년대 후반부터 휴대전화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노무라연구소의 전망은 완전히 빗나갔다. 특히 애플이 아이폰(2007년)과 아이패드(2010년)를 내놓으면서 개인 휴대기기 시장이 폭발적으로 커졌고, 이에 따라 배터리 수요도 급증했다. 게다가 테슬라가 2005년 리튬이온배터리를 장착한 전기차를 처음 내놓고 10여 년이 지난 지금, 머지않은 미래에 엔진을 단 차는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라는 예상이 나올 정도다. 실제로 노르웨이는 2030년부터 엔진을 단 차의 운행을 금지한다고 선언했다. 보통 전기차 한 대에는 휴대전화 3,000대 분량의 배터리가 들어간다.
탁월한 연구 업적으로 세계에서 인정
이처럼 잘 나가는 분야를 연구하게 된 게 행운이라고 겸손하게 말하는 조재필 교수. 하지만 이런 분야에는 그만큼 많은 실력자들이 몰려들기 마련이다. 그가 세계에서 인정받는 이차전지 연구가로 우뚝 선 건 그만큼 연구 업적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재필 교수는 어떤 연구를 해왔을까?
더 오래 가고 빨리 충전되는 배터리를 만들려면 전극의 성능이 좋아야 한다. 현재 리튬이온배터리의 경우 음극으로 흑연이 널리 쓰이고 있다. 흔하고 싼 재료인데다 층상 구조라 틈새에 리튬이온이 쉽게 들어갔다가(충전) 나올 수 있고(방전), 이 과정이 반복돼도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다만 에너지 밀도가 높지 않고 충전 속도도 빠르지 않다.
“그래서 새로운 음극 소재를 개발하는 연구가 많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저희 연구팀의 경우 최근 흑연에 실리콘을 결합한 음극을 만들어 에너지 밀도를 높이고 충전 속도도 1.5배 빠르게 만드는 데 성공했죠.”
사실 실리콘은 흑연보다 에너지 밀도(단위 무게 당 담을 수 있는 전력량)가 10배나 더 커서 오래 쓰는 이차전지를 만들 수 있는 재료로 손꼽힌다. 하지만 실리콘은 충전될 때 즉, 리튬이온이 들어오면 부피가 3배 이상 커지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이렇게 되면 충전 때 팽창, 방전 때 수축이 반복되면서 전극이 금방 망가진다.
조재필 교수팀은 먼저 흑연의 가장자리를 살짝 부식시켜 리튬이온이 좀 더 쉽게 드나들 수 있게 하고, 여기에 실리콘 나노층을 입혀 에너지 밀도를 높였다. 그 결과 기존 흑연 음극에 비해 충전 시간과 속도가 모두 개선된 음극 소재가 나온 것이다. 이 연구 결과를 담은 논문이 지난해 10월 9일자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Nature Communications)>에 실렸다.
조재필 교수팀은 다른 유형의 배터리도 연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아연공기배터리의 경우 양극으로 공기(산소)가 쓰이는데 에너지 밀도가 리튬이온배터리의 4~5배에 이르고 충전도 빨리 된다. 그러나 아연 음극은 반복되는 충전과 방전에 불안정해지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또 양극에서 산소를 수산화이온으로 환원시키거나(방전) 산소를 발생시키는(충전) 반응을 도와주는 싸고 효과적인 촉매를 찾아야 하는 등의 문제가 있어 널리 쓰이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최근에는 같은 학과 김건태 교수팀과 함께 페로브스카이트라는 물질로 다공성나노섬유 촉매를 만드는 데 성공해 백금이나 산화이리듐 같은 기존의 비싼 촉매를 대신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 촉매를 적용한 아연공기배터리는 충전과 방전을 반복해도 안정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연구 결과를 담은 논문이 지난해 10월 20일 학술지<ACS 나노(ACS Nano)> 사이트에 공개됐다.
시장 선도에 대한 자부심과 사명감
조재필 교수가 몸담고 있는 UNIST는 이차전지 연구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조재필 교수를 포함해 이차전지 전공 교수가 8명이나 되고, 대학원에서 ‘배터리 과학 및 기술’ 분야를 독립시켜 매년 40여 명의 대학원생을 따로 뽑는다. 또 지난해 12월 ‘미래형 이차전지 산학연 연구센터’가 문을 열었다. 조재필 교수는 이 연구센터의 초대 센터장이기도 하다.
“저희 센터의 자랑 중 하나는 준양산(pilot) 설비를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험실에서 아무리 성능이 뛰어난 배터리를 만들어도 막상 상업 양산 규모에서도 그렇게 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중간 단계인 준양산 실험이 중요하죠. 제가 알기로는 준양산 설비를 갖춘 대학은 UNIST가 처음입니다.”
학생들은 자신이 개발한 배터리를 준양산 수준까지 규모를 키워 제대로 작동하는지 직접 확인해볼 수 있다. 이와 함께 준양산을 하며 실험실에서와는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배터리 회사 입장에서 준양산 경험이 있는 연구원들은 ‘준비된 인재’인 셈이다.
“저희는 기본적으로 엔지니어(공학자)입니다. 기초 연구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연구가 실생활로 이어질 때 큰 보람을 느끼죠.”
조재필 교수는 지금까지 28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고, 200여 건의 특허를 출원했다. 지난 7월에는 미국화학회가 선정하는 재료과학·공학 분야 ‘저널 스타(Journal Stars)’로 선정되기도 했다. 또 지난해와 올해 미국 정보서비스업체인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가 발표한 ‘세계 상위 1% 연구자’에 이름을 올리며 연구 영향력을 인정받았다. 현재 조재필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의 인원은 30명이 넘는데, 대학 실험실로는 초대형 규모다. 그와 배터리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현재 배터리 시장은 한·중·일 세 나라가 독점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나라가 가장 앞서 있지요. 배터리 연구자에게는 이상적인 환경이면서 동시에 꾸준히 우위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도 느낍니다.”
이제 50대에 접어든 조재필 교수. 그러나 외모는 족히 10년은 젊어보였다. 인터뷰 내내 미소를 띠며 이야기하는 긍정적인 마인드와 활기 넘치는 태도가 이런 ‘착시’를 불러일으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배터리에 대한 그의 열정과 도전도 같은 선상에 닿아 있다.
글: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서울대 화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지내며 『강석기의 과학카페』, 『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를 저술했으며, 옮긴 책으로는 『반물질』, 『가슴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