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UNIST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국립연구소에 취업한 동문이 있다. 에너지 및 화학공학부 조재필 교수의 제자, 정수경 박사다. 지금은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기업으로 자리를 옮긴 그가 3년 만에 한국 땅을 밟았다. 오랜만에 모교를 찾은 반가운 얼굴, 정수경 박사를 만나 그간의 경험에 대해 들었다.
정수경 박사는 학위를 받고 한 달 뒤 미국으로 떠났다. 박사 후 연구원으로 미국 내 대학과 국립연구소를 두고 고민한 끝에 ‘연구소 행’을 택했다. 대학도 좋지만 해외 국립연구소라는 새로운 환경을 경험해보고 싶었다.
“미국 국립연구소에는 해당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과 경력을 가진 인재들이 모입니다. 그런 우수한 인재들과 교류하고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미국 국립연구소는 전 세계 학생들이 선호하는 일자리로 꼽힐 만큼 높은 위상을 자랑한다. 그곳에서 근무한 정 박사는 시야를 넓히고, 귀한 인연을 맺으며 실리콘밸리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짧지만 좋은 경험, 미국 국립연구소
정 박사가 맨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퍼시픽 노스웨스트 국립연구소(Pacific Northwest National Laboratory, 이하 국립연구소)’다. 그는 이곳에서 배터리의 양극 소재와 음극 소재, 바인더(전극을 만들 때 필요한 요소 중 하나) 개발 업무를 담당했다.
연구 환경이 무척 좋았고, 근무 조건도 유연했다. 인종차별에 대해서 엄격하게 금지하는 분위기였기에 자연스레 상대방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인간적인 갈등이 거의 없으니 스트레스가 없고 협업도 잘 이뤄졌다.
그런데 이곳에서 1년 7개월을 보낸 정 박사는 돌연 실리콘밸리로 향했다. 이직을 결심한 이유는 단 하나다. 자신의 연구가 더 이상 발전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들었던 것이다.
“제가 주로 연구하는 분야는 배터리 소재 합성입니다. 국립연구소의 연구 환경이나 분석기기는 무척 좋았지만, 정작 소재 합성 관련 기기와 시설은 UNIST에 미치지 못했어요. 처음엔 이런 사실을 미처 몰랐어요. 1년 이상 생활하다 보니 소재 합성에 관해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걸 깨닫게 됐죠.”
그는 2016년 4월부터 실리콘밸리에 있는 배터리 소재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배터리 소재 합성과 더불어 셀(cell) 제작을 맡았다. 자신이 꾸준히 연구할 수 있고, 또 잘해낼 수 있는 분야를 선택한 것이다.
희망을 만드는 곳, 실리콘밸리
실리콘밸리에서 정수경 박사가 가장 인상적으로 본 건 벤처 투자회사인 YC(Y Combinator)에서 주최한 ‘스타트업스쿨’이었다. 우연찮게 참석한 그곳에서 새롭고 신선한 자극을 많이 받았고, 이를 계기로 그의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실리콘밸리의 매력을 제대로 느낀 시간이었습니다. 행사장을 찾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회사를 가지고 있었어요. 자기만의 목표를 가지고 회사를 만들어서 운영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무척 큰 자극을 받았습니다.”
그 덕분에 자신의 아이디어가 가치 있다면, 벤처 창업도 가능하다는 자신감과 깨달음을 얻었다. 그때까지 창업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니 실로 대단한 변화였다. 그가 경험한 실리콘밸리는 과연 어떤 곳이었을까.
“실리콘밸리에서는 실패라는 단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실패라는 작은 경험이 또 다른 데이터가 될 수 있으니까요. 이런 경험을 토대로 점점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가능한 곳이죠. 그게 바로 실리콘밸리의 가장 큰 매력이자 장점이에요.”
그는 자신의 경험을 곧잘 친구와 후배들에게 이야기한다. 아울러 국내에만 머무르기보다는 실리콘밸리 등 해외 문화와 분위기를 직접 접해보길 권한다.
“실리콘밸리에는 애플, 구글, 페이스북, 이베이, 테슬라 등 유명한 기업들이 많습니다. 모두 스타트업으로 시작해서 세계적인 회사로 성장했죠. 그곳에는 분명 스타트업을 키우는 다양한 환경과 노하우가 있어요.”
후회 없는 선택, 배터리와의 인연
정수경 박사는 GIST(광주과학기술원)에서 태양전지 소재 합성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런 그가 어떻게 배터리와 인연을 맺고 실리콘밸리 스타트업까지 진출하게 된 걸까.
“석사 때 제가 연구했던 소재가 탄소나노튜브(CNT)였습니다. 당시 배터리가 한창 주목받던 시절이라 배터리와 탄소나노튜브를 키워드로 검색을 했는데, 가장 먼저 뜬 화면이 조재필 교수님이었어요. 연락을 드려 만남을 가졌고, 고민 끝에 UNIST 진학을 결정했습니다.”
조재필 교수와 인연을 맺으면서 정 박사의 배터리 인생이 시작됐다. 돌이켜봐도 이 선택은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 스마트폰, 노트북은 물론 각종 전자기기에서 배터리를 빼놓기 어려운 세상이 왔기 때문이다.
“배터리는 활용 분야가 넓습니다. 앞으로 제가 만든 배터리 소재와 전지(cell)가 전기자동차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 적용될 수 있길 바랍니다.”
그는 스승에 대한 감사함이 큰 만큼 더 좋은 연구자가 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자신의 경험에 비춰 후배들에게 조언도 남겼다. “남들이 닦아놓은 길, 똑같은 길만 가려고 하지 말고 자기만의 길을 만들어 새롭게 도전하라”는 메시지다. 물론 큰 용기와 도전이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목표를 향해 묵묵히 그리고 꾸준히 길을 닦다 보면 그 안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기대 이상으로 클 것이다.
후배들이 좀 더 많은 희망과 용기, 철학을 가졌으면 합니다. 자기만의 뚜렷한 목표를 만들어서 시도해보세요. 그렇게 즐겁게 일하다 보면 한국 청년들의 모습도 한층 밝아지지 않을까요?”
그는 실리콘밸리가 그런 희망을 만들 수 있는 곳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래서 과감히 도전하길 권한다. 그가 실리콘밸리에서 배운 것처럼.
글: 오인숙 김형윤편집회사 부장